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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망유린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6-09-01 12:4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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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지 신부’ 임피제 아일랜드 출신의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임피제(패트릭 제임스 맥글린치) 신부. 1954년 제주도 한림성당으로 부임해 2018년 선종할 때까지 제주 주민을 위해 헌신했다.
ⓒ 성이시돌센터
제주도는 아름답지만 살기에는 힘겨운 곳이었다. 물이 금방 빠지는 현무암 풍화토의 특성 탓에 농사 지을 만한 땅이 드문 데다 육지 권력의 수탈과 착취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봉기로 시작된 유혈 사태가 6년 넘게 이어지는 바람에 그나마 있던 농토는 황폐해지고 젊은 남성 인력도 부족했다.
1954년 4월 11일 제주도 북서쪽 한림면(1956년 읍으로 승격). 끔찍한 살육은 거의 그쳤지만 한라산 금족령은 해제되지 않았다. 주민들의 얼굴에는 공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희망의 빛은 찾아보기 어려울 때였다. 훤칠한 키의 외국인 신부가 지프차에서 내리자 동네 사람이 구경하러 하나둘 모여들었다. 한국말을 모른다고 여겨 수군거렸다.
"미군인가?", "저 옷은 군복이 아닌 것 같은데?" 등의 말을 자기네끼리 주고받던 중 잠자코 듣고 있던 신부가 갑자기 휙 돌아서서 아직은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 미국 놈 아니에요. 아일랜드 놈이에요."
그 순간 동네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크게 웃어본 기억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할 만큼 오랜만이었다. 전날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항에 입항한 패트릭 제임스 맥글린치 신부와 한림면 주민들의 첫 만남은 이렇게 유쾌하게 시작됐다.
제주도민의 가톨릭 인식 바꾼 아일랜드 신부들
▲ 한국 독립유공자 아일랜드 신부들 왼쪽부터 아일랜드 성골롬반외방선교회의 패트릭 도슨, 토머스 라이언, 어거스틴 스위니 신부. 일제강。기 말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고 일본의 패전을 예언해 옥고를 치렀다. 2024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 국가보훈부
아일랜드는 우리나라와 닮은 。이 많다. 오랫동안 영국 식민지로 있다가 전쟁을 벌여 1922년 독립했으나 북아일랜드와 분단된 상태다. 1845년 감자 역병으로 인한 대기근 시기에 200만 명이 미국 등으로 이민하기도 했다.
1916년 아일랜드에 성골롬반외방선교회가 만들어져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가 맡아오던 조선 가운데 전남 지역을 담당하기로 했다. 1946년 분리되기까지 전남에 속했던 제주에서는 주민들이 천주교인들의 횡포에 반발해 1901년 5월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을 일으킬 만큼 가톨릭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이를 바꿔놓은 이들이 아일랜드 출신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신부들이었다.
1934년 제주로 부임한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도슨, 토머스 라이언, 어거스틴 스위니 신부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독립 의식을 고취하다가 유언비어 유포 및 불경죄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해방 뒤에도 전후 복구와 빈민 구제에 힘썼고 1999년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맥글린치는 1928년 6월 6일 아일랜드 도니골주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체격이 좋아 학창 시절 럭비와 수영 선수로 활약했다. 성골롬반 신학대를 마치고 1951년 사제품을 받은 뒤 한국 선교사로 임명됐다. 6·25 전쟁이 한창이어서 파송이 미뤄지다가 1953년 1월 아일랜드 남부 코브항을 떠났다.
▲ 젊은 날의 임 신부 임피제 신부의 젊은 날 모습. 체격이 좋아 학창 시절 럭비와 수영 선수로 활약했다.
ⓒ 성이시돌센터
대서양과 북미 대륙과 태평양을 횡단한 뒤 4월 14일 일본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에 내렸다. 전남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7개월간 머물며 해럴드 헨리 신부에게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다가 순천 저전성당 보좌신부로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인들이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맥글린치의 영문 첫 글자 'M'과 발음이 비슷한 '임(任)'으로 한국식 성을 지었다. 피제(皮濟)라는 이름은 1973년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을 때 정한 것으로 패트릭의 영문 첫 글자 'P'와 제임스의 한글 첫 글자 '제'에서 땄다.
"이 사람들 잘살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어요"
▲ 한림성당 신축 공사 1954년 옛 한림성당의 건축 당시 모습. 미군 화물선에 실린 목재를 무상으로 기증받아 1955년 완공했다.
ⓒ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 완공 당시의 한림성당 왼쪽은 1955년 완공 당시의 한림성당 본당 건물. 오른쪽은 1955년 7월 6일 열린 축성식 기념사진.
ⓒ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 한림성당 공사 현장의 임 신부 한림성당 건축 공사 현장에서 임피제 신부(왼쪽)가 공사 관계자와 함께 찍은 사진.
ⓒ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이듬해 봄 임 신부는 새 임무를 부여받았다. 제주도 북서쪽 한림면(1956년 읍으로 승격) 공소에 성당을 세우고 초대 주임신부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를 말한다. 한림공소 신도는 갓난아이까지 합쳐도 30명이 채 되지 않았고 임시 건물에서 미사를 올리는 형편이었다. 당장 성당 건물부터 지어야 했으나 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 막막했다.
그해 초여름 인근 앞바다에 미국 화물선이 좌초했다. 배를 수리하는 동안 천주교 신자 선원 몇 명이 미사에 참여하러 왔다가 사정을 듣고 배에 실린 목재를 가져가라고 했다. 목재를 옮길 때는 신자가 아닌 주변의 모든 마을 주민이 나섰다. 제주도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 신자들도 성당 축성 헌금에 동참했다. 여러 기적이 겹쳐 이듬해 5월 한림성당 본당 건물이 완공될 수 있었다. 강당과 사제관도 함께 들어섰다. 임 신부는 성당 문을 활짝 열어 마을 주민의 사랑방 겸 교육장으로 활용했다.
선결 과제가 해결되자 임 신부는 주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렸다. 선교는 나중 문제였다. 아버지한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그때 제주도 사람들 너무 가난했어요. 매일 기도했습니다. 이 사람들 잘살게 해 달라고. (중략) 계속 부탁만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저는 아버지께 아직도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고심 끝에 아일랜드도 땅이 척박해 농사 대신 목축으로 생계를 꾸리는 집이 많다는 。에 착안해 가축을 키우기로 했다. 아버지가 수의사여서 약간의 지식도 있었다. 당시 제주도 농가에서는 토종 흑돼지를 화장실에 가둬 똥을 먹여 키웠다. 몸집이 크고 새끼 많이 낳는 품종을 들여와 좋은 사료를 먹이면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어른들은 아무리 생활 방식을 바꾸라고 해도 듣지 않기에 청소년 단체 4H클럽을 조직했다.
▲ 트럭에 탄 4H 회원들 임피제 신부가 이끄는 한림읍 4H클럽 회원들이 트럭을 타고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에 4H클럽 깃발이 보인다.
ⓒ 성이시돌센터
▲ 4H클럽 회원들과 임피제(맨 뒷줄 가운데) 신부가 4H클럽 회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 성이시돌센터
경기도로 피정을 다녀오는 길에 4H클럽 모범 농장을 찾아가 새끼 밴 요크셔종 암퇘지 한 마리를 사서 끌고 왔다. 꼬박 이틀간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목포까지 이동한 뒤 배로 제주항에 도착했다. 서양 신부가 돼지를 끌고 가는 모습은 좋은 구경거리가 됐다.
돼지가 새끼 열 마리를 낳자 회원들에게 나눠줬다. 나중에 새끼를 낳으면 두 마리를 갚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다 크기도 전에 부모가 잡아먹거나 팔아버리는 일이 생겨났다. 미국 농업원조를 통해 받은 사료용 옥수수를 나눠줘도 빚에 시달리던 농가들은 내다 팔기 일쑤였다. 내륙의 중산간 지대에 땅도 사들이고 4H클럽 회원들과 함께 가축 기르는 법도 공부하며 목장과 가축은행을 키워나갔다.
전 세계 농부의 수호성인 이름 딴 성이시돌목장
목장이 정식으로 문을 연 것은 1961년 11월이다. 전 세계 농부의 수호성인 이시도르(1070~1130)의 이름을 따 성이시돌목장이라고 이름지었다.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에서 하느님에게 순종하며 농사를 짓던 이시도르는 독실한 신앙심에 감복한 천사들의 도움으로 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2년에는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를 만들어 개량종 돼지, 면양, 육우, 젖소 등을 들여오고 배합사료 공장과 치즈 가공공장을 운영했다. 아일랜드에서 건축 기술을 배워 이라크 바그다드 근교 지역에서 유래된 양식의 테시폰 주택을 지었다. 뉴질랜드 조지 홈즈 박사의 지도를 받아 목초지 개발에도 성공했다.
▲ 테시폰 주택 임피제 신부가 4H클럽 회원들과 함께 지은 테시폰 주택. 지금까지 남아 있는 두 동이 문화재청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됐다.
ⓒ 성이시돌센터
1959년에는 양털에서 실을 뽑고 천을 짜는 한림수직사(翰林手織社)를 세웠다. 직조 기술을 지닌 아일랜드 수녀들을 초청해 직공들을 가르쳤다. 제주 여성 사이에서는 양털실 뜨개질 붐이 일어났다. 1962년 서독 방문길에 박정희 대통령과 동행한 부인 육영수는 노라노가 디자인한 한림수직 순모 코트와 원피스를 입어 명품으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서울 조선호텔과 서귀포 칼호텔에 직매장을 냈고 혼수품으로 각광받았다. 미스코리아 진이 미스유니버스대회에 참가할 때 입어 화제가 되는가 하면 주한 외교사절 부인들도 즐겨 입었다. 제주 여성들의 일자리 확보와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했다.
성이시돌목장은 축산 현대화를 이끈 최첨단 목장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교육생이 몰려왔으며 박정희 대통령도 직접 찾아 격려했다.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포장도로가 놓이고 전기와 전화도 가설됐다. 새마을운동의 모범 사례로 꼽혔으나 임 신부는 '새마을 노래'에도 나오는 초가집 없애기는 반대했다.
▲ 성이시돌목장 찾은 박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이 성이시돌목장을 방문해 돼지 사육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 성이시돌센터
1975년 8월 27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제주도의 초가 지붕은 제주도밖에는 온 세계에 아무 데도 없는 것"이라며 "그것을 헐고 온 세계에 아무 데나 있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겨울에 따스하고 여름에 시원한" 지붕은 그대로 두고 내부를 현대식으로 꾸미면 관광 산업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 “제주도 초가지붕은 살려야”란 제목으로 이규태 논설위원과 임피제 신부의 대담이 실린 1975년 8월 27일 자 조선일보 3면.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제주 전통 초가는 거센 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낮고 완만한 지붕 위에 억새나 띠를 인 뒤 바둑판처럼 단단하게 줄을 맨 것이 특징이다. 문화재청과 제주도는 전통 초가와 장인을 유무형 문화유산으로 보호하고 있다. 최근 제주의 전통 초가 숙소가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 시대를 앞서간 임 신부의 혜안이 돋보인다.
▲ 제주의 전통 초가 서귀포시 표선면 제주민속촌의 전통 초가.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억새나 띠, 돌, 흙, 나무를 이용해 지었다.
ⓒ 제주관광공사
1977년에는 돼지 수출로 815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해 우리나라 수출이 100억 달러를 돌파했으니 총액의 1%에 가까운 큰돈이었다. 지금은 면적이 165㏊(역 50만 평)로 줄어들었지만 한때 500㏊(약 150만 평)로 우리나라 최대를 자랑했다.
임 신부 별명이 '돼지 신부'일 만큼 양돈은 이시돌목장의 주업이었으나 '돼지 가격 안정'을 내세워 정부가 시장에 자주 개입하는 바람에 손해를 입자 1980년 접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산 의류의 등장으로 경쟁력을 잃자 면양 기르기도 중단하고 한림수직도 2005년 폐업했다. 지금은 경주용 말과 젖소가 목장을 채우고 있다.
4명밖에 받지 못한 대한민국 명예국민증
예전에는 농민이 은행 빚을 내기 어려워 계(契)를 통해 목돈을 마련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종종 계주가 잠적해 말썽이 나곤 했다. 신자 가운데 한 명도 계가 깨져 빚 때문에 자살하자 1962년 한림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전국에서 7번째였고, 제주에서는 처음이었다. 지금은 제주도에 28개의 신협이 운영되고 있다.
1970년에는 성이시돌복지병원을 개원해 저소득층 주민에게 무료 진료를 펼쳤다. 1981년 양로원에 이어 이듬해 경로당과 노인학교도 만들었다. 성이시돌병원은 2007년 한림읍에서 성이시돌목장으로 이전하며 말기암 요양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전환했다. 양로원은 요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 대한민국 명예국민증 2018년 6월 5일 임피제 신부에게 전달된 대한민국 명예국민증. 지금까지 히딩크 감독, 마리안느·마가렛 간호사 등 4명에게만 주어졌고, 작고 후 추서된 것은 처음이다.
ⓒ 성이시돌센터
나라 안팎의 찬사와 격려가 쏟아졌다. 1973년 제주도 명예도민이 된 데 이어 2014년 자랑스러운 제주인으로 선정됐다. 석탑산업훈장(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2015년), 필리핀 막사이사이상(1975년), 아일랜드 행정인권상 대통령상(1975년) 등도 받았다.
2018년 4월 23일 심근경색과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 성이시돌목장에 묻혔다. 90세가 되는 해였고, 한국에 온 지 65년 만이었다. 정부는 대한민국 명예국민증을 추서했다. 월드컵 축구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와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본 간호사 마리안느·마가렛 등 4명밖에 누리지 못한 영예였다.
임피제 뒤이은 이어돈 신부 한국 사목 40년
▲ 젖소와 이어돈 신부 임피제 신부의 뒤를 이어 성이시돌목장을 이끌고 있는 이어돈 신부. 풀밭에서 젖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 성이시돌센터
수의학을 공부하던 아일랜드의 23살 청년 마이클 조셉 리어던(한국명 이어돈)이 봉사 활동을 하러 1978년 성이시돌목장을 찾았다. 임 신부 인품에 감화되고 제주 주민들의 품성에 매료된 그는 2년의 임기를 넘겨 6개월 더 머물다가 귀국했다. 수의사 겸 사제가 되어 1986년 8월 한국을 다시 찾았다. 서울에서 빈민 선교 등을 하다가 2004년 성이시돌목장 옆 금악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임 신부 뒤를 이어 2011년부터 성이시돌목장 법인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8년 아산상을 받았다.
▲ 아산상 받는 이어돈 신부 이어돈 신부가 2018년 11월 22일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제30회 아산상을 받고 있다.
ⓒ 아산사회복지재단
▲ 성이시돌센터 성이시돌센터 입구(위)와 성이시돌센터 내부의 전시실. 임 신부의 생애와 성이시돌목장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 성이시돌센터
성이시돌목장 한쪽에는 성이시돌센터가 있다. 세미소오름이 마주 보이고 뒤편에는 세미소(호수)가 있다. 임 신부가 양 떼를 돌보는 모습의 동상을 지나 전시관에 들어서면 임 신부의 생애와 성이시돌목장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임 신부 무덤 주변은 '세미 은총의 동산'으로 꾸며졌다.
▲ 양 떼 돌보는 임 신부 성이시돌센터 앞에 세워진 임피제 신부 동상. 양 를 돌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 성이시돌센터
1955년 축성된 한림성당은 1999년 도로 확장 공사로 철거되고 바로 옆에 다시 지어졌으나 종탑은 보존했다. 2022년 제주에서 4번째로 도 지정 등록문화재가 됐다. 이시돌목장에 남아 있는 테시폰 주택 두 동은 2021년 문화재청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24년 12월 22일에는 창작 오페라 '제주의 기적 맥그린치'가 선보이기도 했다.
▲ 한림성당 종탑 옛 한림성당의 3개 종탑 중에서 유일하게 남은 가운데 종탑. 제주의 고유 재료인 현무암을 외장재로 사용해 3층 높이로 세웠다. 2022년 제주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 성골롬반외방선교회
▲ 임 신부 일대기 담은 오페라 포스터 임피제 신부의 일대기를 창작 오페라로 꾸민 ‘제주의 기적 맥그린치’ 포스터.
ⓒ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
2016년에는 목장 입구에 '우유부단'이란 이름의 카페가 문을 열었다. 미스터밀크는 성이시돌목장 우유로 만든 치즈와 아이스크림, 우유샌드를 생산하고 있다. 재주상회는 2021년부터 성이시돌목장과 함께 '한림수직 재생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이처럼 임 신부가 남긴 유산은 이어돈 신부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 의해 기억되고 발전하고 있다.
▲ 농식품부 장관과 이어돈 신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2025년 9월 3일 미스터밀크 생산 공장을 방문해 이어돈 신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농식품 모태펀드 투자를 받은 미스터밀크는 성이시돌목장의 우유로 치즈와 아이스크림 등을 생산하고 있다.
ⓒ 농림축산식품부
덧붙이는 글 | 임 신부의 영문 성의 규범 표기는 맥글린치입니다. 그에 따라 본문에 그렇게 표기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 자료나 도서 등에서 맥그린치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등에는 그렇게 썼습니다. 혼동의 소지가 있지만 어쩔 수 없네요. 이시돌목장도 고유명사여서 그대로 썼지만 수호성인 이름은 규범 표기에 맞게 이시도르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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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초록–제주 이시돌 목장 이야기> <제주한림이시돌 맥그린치 신부-오병이어의 기적>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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