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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성언은 물끄러미 그리도 범위 기자 admin@slotmega.info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이 1977년 미국 주뉴욕총영사관 재직 당시 사무실에서 찍은 모습.
1976년 3월 24일 나는 외교관으로서 첫 번째 임지 근무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안고 아내와 두 살배기 딸을 데리고 뉴욕에 갔다. 한데 뉴욕의 상황은 기대와 전혀 달랐다. 정부에서 주는 봉급은 기본적인 생활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집을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우드사이드란 곳에 얻었는데, 아파트가 너무 낡아 직업이 외교관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뉴욕총영사관은 총영사(정도순, 훗날 윤호근 바다이야기프로그램 )와 부총영사(이후 이상훈 부임), 권인혁(훗날 주프랑스대사) 최혁(훗날 주제네바대사, 후임 김용집) 영사, 방병채(훗날 주불가리아대사) 부영사 등 각 부처 주재관 10여명이 속한 비교적 큰 공관이었다. 여기서 나는 총무를 담당했다. 총무는 총영사관 예산과 행정, 직원 관련 일과 관저 운영, 손님 영접 등을 담당한다. 그런데 총무과에 타자수도 없고, 짐 싣 오징어릴게임 는 밴 한 대를 제외하고는 공무용 자동차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보고서는 대부분 내가 직접 타자를 쳐서 작성해야 했고,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개인 자동차로 공항에 나가 영접했다. 뉴욕을 오가는 여러 인사를 영접·전송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오가는 외교행낭을 발송하기 위해 한 달에 평균 30~40번씩 케네디 국제공항을 드나들었다. 당시는 한국 오션파라다이스예시 행 국적기가 자정을 넘겨 출발했기에 손님을 전송하고 집에 돌아오면 늘 새벽 1시가 넘었다. 이 때문에 업무가 밀려 공항에 갔다가 사무실로 돌아와 밤늦게까지 일할 때도 꽤 됐다.
77년 12월 말 토요일 아침, 이날도 다음 주에 보낼 금년도 마지막 외교행낭 편으로 본부에 보고할 게 많았다. 출근하려 하는데 임신한 아내가 나를 불러세웠다. “ 바다신2게임 아무래도 오늘 해산을 할 것 같다”고 했다. 다급한 마음에 총영사관 직원과 현지 직원 집에 연락했지만 토요일이라 그런지 다들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간신히 통화가 된 한 현지 직원 집에 무작정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3살 된 딸을 잠시 맡아달라고 사정했다. 그리고는 아내를 데리고 산부인과로 찾아가 의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나는 사무실로 갔다. 저녁 늦게 의사 황금성게임랜드 가 사무실로 전화를 해 아내가 아들을 순산했다며 축하를 건넸다. 즉시 병원으로 달려가 아내를 위로하고 딸을 찾으러 갔다.
현지 직원의 아파트에 도착해보니 딸이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직원은 우리가 딸을 맡기고 떠난 때부터 지금껏 딸이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고 했다. 나는 딸과 함께 귀가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일요일인 다음날도 나는 일이 많아 딸을 다시 현지 직원 집에 맡기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저녁 늦게 일을 마치면 병원에 들러 아내를 위로한 후 딸을 집으로 데려와 저녁을 함께했다. 해산한 아내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이틀간 딸을 남의 집에 맡기고 일만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답답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내와 딸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당시 주유엔한국대표부에는 두 명의 대사가 있었다. 그중의 한 명은 박정희 대통령의 맏사위(전 부인에게서 난 딸의 남편)였는데, 그는 뉴욕주 북부의 고급 주택지 스카스데일에 큰 주택을 가지고 있었다. 76년 11월 말 뉴욕타임스(NYT)는 “해당 주택이 박정희 대통령이 실각할 경우 망명처로 사용될 것이라는 소문이 한인 사회에서 떠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오자 그는 갑자기 주캐나다대사로 발령이 났다. 해당 주택은 당장 처분이 어려워 총영사 관저로 사용하게 됐다. 미국서 대형 주택을 유지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런 주택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를 관리하는 모든 일이 생소하고 힘들었다.
당시 미국인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디 있는지도 잘 몰랐다. 76년 10월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로 시작된 ‘코리아게이트’, 이른바 ‘박동선 사건’(재미실업가 박동선의 미국 의회 로비 활동이 정치 스캔들로 보도됨으로써 3년 가까이 한·미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던 사건)으로 인해 미국 사회에 한국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됐다. 이를 계기로 73년부터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이듬해 6월 NYT와의 기자회견과 미국 연방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 정권 내부의 비리를 폭로했다. 이런 가운데 주미 대사관과 뉴욕총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중정 요원들이 차례로 미국에 망명을 신청했다. 이들 내용이 미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걸 보며 어디 가서 한국 외교관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부끄러웠다.
나는 이미 공관 살림과 온갖 궂은일을 도맡는 총무 업무를 2년이나 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을 떠나올 때 생각하고 기대했던 외교관 생활이 아니었다.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외교관 본연의 일을 하고 싶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도 좀 더 여유가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뉴욕 근무 2년 반이 넘어갈 무렵 본부에 “험지라도 좋으니 자리를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후 연락이 와 미국을 관장하는 북미담당관실로 발령이 났다.
가난했고 일도 고됐던 뉴욕 생활이었지만 영어를 익히고 동시에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 많은 걸 보고 배웠다. 가장 좋았던 건 일하며 항상 남을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뉴욕에 주재한 한국의 각 기관, 은행, 기업 관계자와 미국 교포, 유학생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데 감사했다. 미국서 아들을 얻은 것도 큰 기쁨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78년 10월 중순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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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월 24일 나는 외교관으로서 첫 번째 임지 근무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안고 아내와 두 살배기 딸을 데리고 뉴욕에 갔다. 한데 뉴욕의 상황은 기대와 전혀 달랐다. 정부에서 주는 봉급은 기본적인 생활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집을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우드사이드란 곳에 얻었는데, 아파트가 너무 낡아 직업이 외교관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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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보고서는 대부분 내가 직접 타자를 쳐서 작성해야 했고,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개인 자동차로 공항에 나가 영접했다. 뉴욕을 오가는 여러 인사를 영접·전송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오가는 외교행낭을 발송하기 위해 한 달에 평균 30~40번씩 케네디 국제공항을 드나들었다. 당시는 한국 오션파라다이스예시 행 국적기가 자정을 넘겨 출발했기에 손님을 전송하고 집에 돌아오면 늘 새벽 1시가 넘었다. 이 때문에 업무가 밀려 공항에 갔다가 사무실로 돌아와 밤늦게까지 일할 때도 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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