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자연, 시알리스로 찾는 새로운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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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재라어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5-12-01 04:12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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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자연과 맛있는 사랑,
시알리스로 찾는 새로운 자신감
자연 속에서의 시간은 사람들에게 휴식과 힐링을 제공합니다. 그곳에서는 세상의 복잡한 문제들을 잠시 잊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채우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깊은 여유 속에서 진정한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는 내면적인 자신감과 편안함이 필요합니다. 특히 연인 간의 관계에서는 성적 자신감이 큰 역할을 하며, 이는 관계의 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성적 자신감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연애와 사랑을 충분히 즐기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많은 남성들이 성적 문제로 인해 자신감을 잃고, 그로 인해 연애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시알리스입니다. 시알리스는 발기부전 치료제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성적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고, 연애에서의 만족감을 높여주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자연 속에서 사랑을 만끽하기 위한 시알리스의 역할과 시알리스를 활용한 성적 자신감 회복 방법에 대해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시알리스의 효과와 사용법, 주의사항을 자세히 안내하여, 더욱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사랑을 즐길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자연 속에서의 사랑, 그리고 자신감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줍니다. 푸르른 숲 속에서의 산책, 바닷가의 시원한 바람, 별빛 가득한 하늘은 모두 사람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선사합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도 성적 자신감이 결여되면 사랑을 온전히 즐기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연인 간의 관계는 단순한 대화나 눈빛 교환을 넘어서, 깊은 유대감과 성적 교감을 필요로 합니다. 성적 자신감이 부족하면, 사랑을 표현하고 깊은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성적 문제는 남성들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줄 수 있으며, 이는 정신적, 신체적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이 결여된 상태에서 연애를 이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시알리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시알리스는 성적 문제를 해결하고, 그로 인해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시알리스의 역할: 성적 자신감 회복
시알리스는 발기부전 치료제 중 하나로, 주로 남성들이 경험하는 성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됩니다. 시알리스의 주요 성분인 타달라필은 성기 주변의 혈류를 증가시켜, 발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는 성적 활동을 보다 자연스럽고 원활하게 만들어주며, 성적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시알리스의 작용 원리
시알리스의 주요 성분인 타달라필은 PDE5포스포디에스터라제 5 억제제로, 성기 주변의 혈관을 확장시켜 혈류를 원활하게 만들어줍니다. 이로 인해 성적 자극에 대한 반응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며, 발기 유지가 가능해집니다. 이는 성적 불안감을 줄여주고, 자연스러운 성적 활동을 돕습니다.
장시간 지속되는 효과
시알리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36시간까지 지속되는 효과입니다. 이는 시알리스를 복용한 후 약 1시간 내에 성적 활동을 할 준비가 되며, 그 이후에도 긴 시간 동안 성적 자극에 대한 반응을 지원합니다. 긴 지속 시간 덕분에 성적 활동에 대해 과도한 압박감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고 여유 있는 만남을 즐길 수 있습니다.
심리적 안정감 제공
성적 문제는 단순한 신체적 증상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은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성적 자신감 부족은 불안감을 유발하고, 이는 사랑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만듭니다. 시알리스를 복용하면 성적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어, 연인과의 관계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더욱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시알리스 활용법: 사랑을 만끽하는 방법
자연 속에서 사랑을 만끽하는 동안, 시알리스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알리스는 올바르게 사용해야 그 효과를 최대한 누릴 수 있습니다.
복용 시기와 용량
시알리스는 성적 활동 최소 30분에서 1시간 전에 복용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이는 약물이 효과를 발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며, 복용 후 약 36시간 동안 효과가 지속됩니다. 일반적으로 10mg 또는 20mg 용량으로 복용할 수 있으며, 개인의 건강 상태와 필요에 맞춰 적절한 용량을 전문가와 상담 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용 후 성적 자극이 있을 때, 시알리스의 효과가 자연스럽게 발휘됩니다. 성적 활동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해두면,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만남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연인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러운 대화와 교감
시알리스는 성적 활동을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며, 불필요한 불안을 제거합니다. 이는 연인 간의 관계에서 더욱 자연스러운 대화와 교감을 가능하게 합니다. 성적인 불안 없이 연인과의 대화를 즐기며, 사랑을 표현하는 데 더 많은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성적 활동
시알리스의 장점은 성적 활동을 위한 준비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복용 후 긴 시간 동안 효과가 지속되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성적 활동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쁜 일정을 가진 사람들이나,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순간에 큰 장점이 됩니다.
시알리스 복용 시 주의사항
시알리스는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약물이지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사용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 전에 전문가의 조언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문가와의 상담
시알리스를 복용하기 전, 특히 심혈관계 질환이나 다른 약물을 복용 중인 경우,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 복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문가의 조언을 따라 적절한 용량과 복용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음주 주의
시알리스를 복용한 후 과도한 음주는 시알리스의 효과를 저하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음주로 인해 성적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 있으므로, 적당한 음주가 권장됩니다.
부작용
시알리스는 일반적으로 안전하지만, 두통, 얼굴 홍조, 소화불량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증상이 지속되거나 심각해질 경우, 즉시 전문가와 상담해야 합니다.
결론자연 속에서 사랑을 만끽하는 자신감을 위한 시알리스
자연 속에서 사랑을 만끽하고, 그 속에서 더 깊은 유대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성적 자신감이 필수적입니다. 시알리스는 성적 자신감을 회복하고, 사랑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시알리스를 통해 성적 문제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사랑을 즐길 수 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하고, 연인과의 관계에서 더욱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시알리스를 활용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시알리스를 복용함으로써 자신감을 얻고, 자연 속에서 깊고 의미 있는 사랑을 만끽하세요.
시알리스 10mg 판매 제품은 주로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가벼운 증상 개선에 효과적입니다. 보다 강한 효과를 원한다면 시알리스 20mg 복용법을 참고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관계 1~2시간 전에 복용하면 최대 효과를 볼 수 있으며, 하루에 한 번 이상 복용은 피해야 합니다. 시알리스 구매 약국에서는 비아그라구매 사이트 전문가의 상담을 통해 안전한 사용법을 안내받을 수 있습니다. 해외 제품을 원한다면 시알리스 구매대행 서비스를 활용할 수도 있지만, 정품 여부를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자 admin@slotnara.info
[슬기로운 미술여행 - 45] 오슬로 뭉크 미술관
에스토니아에서 시작해 핀란드, 스웨덴을 거쳐 노르웨이와 덴마크로 서쪽으로 향할수록 날씨는 점점 좋아졌고 해가 지지 않는 여름밤도 계속됐죠. 지난 여름이 더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지난주에 운하뷰 미술관을 소개했으니, 이번에는 오션뷰 미술관으로 가봅니다. 피오르와 오로라의 나라 노르웨이에서 만난 유럽의 손꼽히는 ‘신상’ 미술관이면서, 뷰로는 가장 유명한 미술관입니다.
바다를 보려면 뭉크 미술관 12층으로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13층의 거대한 모노리스, 뭉크 미술관 ©김슬기
오슬로는 중앙역에 내려 광장으로 나오는 순간 눈앞에 바다가 펼쳐집니다. 중앙역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오면 노르웨이를 오션릴게임 대표하는 관광지인 오페라하우스와 국립도서관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탁트인 바다를 보면 감탄하는 이들의 눈에 어김없이 들어오는 ‘강한 존재감’의 건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미술관인 에드바르 뭉크 미술관입니다.
북유럽 화가 중 뭉크 만큼 유명하고 친근한 화가는 없을 겁니다. 덕분에 이 미술관도 북유럽의 야마토통기계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 됐습니다. 화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임에도 2022년에는 연간 방문객수가 150만명을 돌파할 정도의 인기를 얻고 있죠.
이 미술관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유산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1940년 뭉크가 오슬로시에 방대한 유산을 기증하겠다고 밝힌 뒤 설립된 이 곳은 노르웨이의 황금성게임다운로드 국가적인 야심이 투영된 곳입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뭉크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죠.
뭉크의 작품 2만6724점 중 약 1200점의 회화, 7050점의 드로잉과 스케치, 1만8322 점의 그래픽, 14점의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진, 판화, 수천 점의 손글씨와 편지, 그리고 9830점의 개인 소지품도 관리합니다. 이를 포함해 이 곳이 손오공게임 보유한 소장품은 4만2000점에 달합니다.
뭉크와 후원자들의 유산 덕에 뭉크의 걸작들은 바다를 건너 팔려가지 않고 이 도시에 온전히 보존됐습니다. 롤프 스테네르센(Rolf Stenersen), 아말두스 닐센(Amaldus Nielsen), 루드비히 라벤스베르크(Ludvig Ravensberg)를 포함한 주요 노르웨이 후원자들이 기증을 이끌면서 노르웨이 모더니즘의 역사적 맥락을 꿸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죠.
2021년 10월 뭉크 미술관은 에스투디오 에레로스(Estudio Herreros)가 설계한 비요르비카(Bjørvika) 해안 지구의 새 건물로 이전했습니다. 무려 60m 높이 13층 새 건축물은 개관 당시 큰 화제를 모았죠. 수변의 랜드마크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크기 만큼이나 형태도 독특합니다. 하나의 큰 돌덩이처럼 보이는 모노리스(monolith) 형태의 디자인을 띄고 있거든요.
13층 높이 오피스 빌딩을 연상시키는 통유리 외관 건물은 바다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더군요. 모든 유명한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 또한 공개 직후 논란이 있었습니다. ‘못생겼다’는 비난을 받은거죠. 하지만 이 구부러진 모노리스는 ‘실존적 불안’을 상징하는 화가 뭉크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뭉크의 작업실과 생애를 소개하는 공간 ©김슬기
전시는 7개 공간에 걸쳐 이어지는데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층을 거듭해 오르다보면 12층에 닿게 됩니다. 레스토랑 입구가 있는 이 곳에서 내려다보는 오슬로 수변의 모습은 정말 감탄이 나왔습니다.
이전으로 규모가 5배나 커지면서 뭉크 미술관은 정체성에서 변화를 맞이했죠. 뭉크를 보존하고 연구하는 미술관에서, 뭉크 이후 노르웨이 미술의 미래를 고민하는 미술관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저는 이번 방문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상설 전시장을 관람하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키요시 야마모토를 비롯한 신진 작가의 특별전시가 다양하게 열리고 있었거든요.
지난 11월부터는 뭉크 트리엔날레가 개막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올해로 두 번째인 뭉크 트리엔날레는 예술과 기술에 중점을 두고 전시를 기획합니다. 2025년 주제인 <거의 언리얼(Almost Unreal)>은 신진 작가들을 대거 소개하며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점점 더 모호해지는 시대를 탐구하는 전시를 펼쳐보였습니다.
키요시 야마모토의 특별전 ©김슬기
인간 감정을 솔직하게 그려낸 표현주의 화가 뭉크
뭉크 미술관 전시장 내부 전경. ©Munchmuseet
뭉크는 60년이 넘게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 괴력의 화가였습니다. 1880년대에 데뷔할 때부터 1944년 사망할 때까지요. 이 미술관에 기증된 작품만 3만여점 가까이 되니 대단한 숫자입니다.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에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그는 병에 걸려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겨우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그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대신 집에서 교육을 받았죠.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신의 열정을 추구할 자유도 주어집니다. 그는 17살 때 일기에 이렇게 씁니다.
“이제 화가가 되는 것이 제 결정입니다.”
그의 삶을 시시콜콜 소개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삶에는 재미있는 지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뭉크의 빌라에는 늘 그림, 도구,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요. 그림은 야외에 보관되기도 했고, 작품에는 발자국과 새똥, 촛농 흔적도 발견됩니다. 열정적인 사진가였던 뭉크는 수많은 사진을 남겼으며, 그중 다수는 자화상이었을 만큼 ‘셀카’ 중독자였죠. 종종 싸움에 휘말릴 만큼 불같은 기질의 소유자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개는 아주 좋아해서, 폭스테리어인 피프스를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미술사적으로 뭉크는 1890년대 상징주의 운동의 일원이었다가, 1900년대 초반부터 표현주의 예술의 선구자로 변신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자유분방한 화풍의 변천과 열정은 그의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따라가면서 만나보면 더욱 감탄하게 됩니다.
Edvard Munch [Melancholy], 1900–01 ©Munchmuseet
그의 그림이 오늘날에도 설득력을 가지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뭉크의 그림이 당대에 비판적 평가를 받았던 이유 중에는 미완성으로 보인다는 점이 있었죠. 하지만 이 거칠고 미완성처럼 보이는 표현주의 화법은 인간 감정의 어두운 지점을 드러내는 점에서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는 홀로 선 존재의 다양한 측면을 집요할 정도로 그려냈습니다. 그는 우울과 고독을 탐구하는 화가였죠. 예술가 자신이 침잠하며 탐구했던 고독과 고립에 관한 시각은 21세기 현대인에게 큰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보면 우울함이란 감정을 그림에 담아낸 것은 르네상스 이후의 혁명적인 시도였습니다. 15세기 말까지 우울한 기질은 바람직하지 않고 고쳐져야 할 병증으로 여겨졌죠. 하지만 예술가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이었던 ‘멜랑콜리’는 점차 다양한 창작 활동과 연관되어 발전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신비로운 판화 <멜랑콜리아 I>에서 우울함을 시각적으로 의인화한 것으로 절정에 달했죠. 뭉크의 <멜랑콜리아> 또한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입니다.
Edvard Munch [The Sick Child], 1927 ©Munchmuseet
뭉크의 또 다른 특징은 병과 죽음에 집착했다는 점입니다. 뭉크가 14살 때, 누이 소피가 결핵으로 사망한 일을 겪었죠. 뭉크는 이 경험을 결코 잊지 못했고, 평생 이 주제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1885년에 처음으로 소피의 죽음을 그렸습니다. 그의 모델은 병약한 어린 소녀로, 아버지의 환자 중 한 명이었죠.
이 그림은 1886년 노르웨이 가을 박람회에 공개됐습니다. 몇몇 평론가들은 이 그림에 대해 혹독한 평가를 내렸죠. “자신의 작품을 손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몇몇 평론가는 이 어두운 그림에서 “멀리서 바라보면 슬픔과 고통이 느껴지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라 상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병든 아이>는 뭉크에게 돌파구가 되어 오늘날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됐습니다. 뭉크는 평생 이 모티프를 반복해 그렸고, 62세에 그린 작품은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6층 Edvard Munch Monumental 전시장에는 특별한 작품이 있는데요. 뭉크의 정말 집채만 한 초대형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태양(The Sun)> (1910~11) 및 <연구자들(The Researchers)>과 같은 이러한 대규모 작품은 1909년에서 1916년 사이에 오슬로 대학 강당을 위해 제작된, 뭉크 경력에서 가장 까다로운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바지선에 실어서 옮겼을 정도로 까다로운 ‘이사’를 거쳐 이곳에 소장됐습니다. 뭉크의 작품이 아무리 많은 미술관에 있다고 하더라도, 오슬로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 작품은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감정을 선사합니다. 오슬로에 온다면 놓쳐선 안될 볼거리입니다.
왼쪽 벽에 걸린 [태양(The Sun)]을 비롯한 초대형 작품이 걸린 6층. ©김슬기
뭉크의 절규를 만날 확률은 3분의 1
Edvard Munch [The Scream], 1910 ©Munchmuseet
절규의 방에서 숨어 있던 [절규]의 원화가 공개되는 순간의 관람객들. 모나리자 사이즈를 생각했다가 실제로는 커서 인상적이었다. ©김슬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작품 중 하나이자 불안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된 <절규(The Scream)>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제가 오슬로에 도착하자마자 이 곳을 처음으로 찾은 이유는 밤 9시까지 미술관이 문을 여는 탓도 있었지만, 스케치나 모작이 아닌 가장 유명한 <절규>의 오리지널 원화부터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1. 절규는 몇 점이 그려졌을까
뭉크의 절규는 해질녘 두 친구와 함께 한 산책에서 탄생했습니다. 바다를 물들인 노을에 뭉크는 강한 충격을 받았지만 그의 친구들은 무관심했죠. 그는 이 일을 종이에 몇 자의 메모와 이미지로 기록해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여러 버전의 <절규>가 탄생했습니다. 뭉크는 하늘의 패턴을 다양하게 표현한 석판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석판화가 인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 30개로 추정되며 뭉크가 손으로 채색한 것을 포함해 이 중 6개는 뭉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2.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아무도 몰라
<절규>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수수께끼입니다. 일그러진 인물에 대한 완벽한 해석은 존재하지 않죠.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표현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배경의 인물들은 비록 아주 작지만, 이 그림의 열쇠를 쥐고 있을지 모르죠.
뭉크가 세 사람을 직선의 길 위에 배치했습니다. 두 사람이 맹인도 귀머거리도 아니라면, 일그러진 인물의 비명에 반응할 수밖에 없을텐데, 뒤돌아보지 않고 있죠. 소통의 부재를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비명을 지르는 주인공은 뭉크 자신이며, 멈춰 주변을 둘러볼 때가 되었다고 외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3분의 1 확률로 만나는 절규
여러 버전의 <절규>가 제작되었지만 대다수가 매우 취약한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원화, 드로잉, 판화 모두가 불안정한 재료를 포함해, 극도로 어두운 조명과 온도 조절이 가능한 유리 상자 안에 보관됩니다.
미술관은 절규의 세 가지 대표작인 회화(템페라), 드로잉, 석판화의 세 가지 버전을 30분 간격으로 순환 전시됩니다. 미술관 문이 열린 낮 동안에도 이 그림들에게는 휴식이 보장되는 셈이죠. 세 작품 중 어떤 작품이 공개될지는 랜덤이라서 운이 없는 관람객은 원화를 보기 위해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뭉크 뮤지엄의 세 가지 버전 [절규] ©김슬기
<절규>는 노르웨이의 다른 미술관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장 초기 버전(1893년 작)은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 또 다른 대표작인 <마돈나(Madonna)>와 <삶의 춤(The Dance of Life)> 등도 이 곳에서 만날 수 있죠.
사실 뭉크의 초상화전을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만나기도 했고, 취리히 미술관에서도 그의 대단한 컬렉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 다작의 화가였기에 유럽 미술관에서는 누구보다 쉽게 만날 수 있는 작가여서, 호기심이 크게 일지 않는 작가였습니다. 하지만 뭉크 미술관의 그의 방대한 작품과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만나고 나니 그를 다시 평가하게 됐습니다. 이제는 그의 작품을 마주치면 오슬로라는 도시가 떠오를 테고, 시간이 갈수록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런던에서 1년간 만나고 온 ‘유럽 미술관 도장 깨기’를 서울에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일경제신문 김슬기 기자가 유럽의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 비엔날레 이야기를 매주 배달합니다. 뉴스레터 [슬기로운 미술여행]의 지난 이야기는 다음 주소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museumexpress.stibee.com
에스토니아에서 시작해 핀란드, 스웨덴을 거쳐 노르웨이와 덴마크로 서쪽으로 향할수록 날씨는 점점 좋아졌고 해가 지지 않는 여름밤도 계속됐죠. 지난 여름이 더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지난주에 운하뷰 미술관을 소개했으니, 이번에는 오션뷰 미술관으로 가봅니다. 피오르와 오로라의 나라 노르웨이에서 만난 유럽의 손꼽히는 ‘신상’ 미술관이면서, 뷰로는 가장 유명한 미술관입니다.
바다를 보려면 뭉크 미술관 12층으로
바다이야기릴게임연타
13층의 거대한 모노리스, 뭉크 미술관 ©김슬기
오슬로는 중앙역에 내려 광장으로 나오는 순간 눈앞에 바다가 펼쳐집니다. 중앙역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오면 노르웨이를 오션릴게임 대표하는 관광지인 오페라하우스와 국립도서관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탁트인 바다를 보면 감탄하는 이들의 눈에 어김없이 들어오는 ‘강한 존재감’의 건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미술관인 에드바르 뭉크 미술관입니다.
북유럽 화가 중 뭉크 만큼 유명하고 친근한 화가는 없을 겁니다. 덕분에 이 미술관도 북유럽의 야마토통기계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 됐습니다. 화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임에도 2022년에는 연간 방문객수가 150만명을 돌파할 정도의 인기를 얻고 있죠.
이 미술관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유산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1940년 뭉크가 오슬로시에 방대한 유산을 기증하겠다고 밝힌 뒤 설립된 이 곳은 노르웨이의 황금성게임다운로드 국가적인 야심이 투영된 곳입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뭉크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죠.
뭉크의 작품 2만6724점 중 약 1200점의 회화, 7050점의 드로잉과 스케치, 1만8322 점의 그래픽, 14점의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진, 판화, 수천 점의 손글씨와 편지, 그리고 9830점의 개인 소지품도 관리합니다. 이를 포함해 이 곳이 손오공게임 보유한 소장품은 4만2000점에 달합니다.
뭉크와 후원자들의 유산 덕에 뭉크의 걸작들은 바다를 건너 팔려가지 않고 이 도시에 온전히 보존됐습니다. 롤프 스테네르센(Rolf Stenersen), 아말두스 닐센(Amaldus Nielsen), 루드비히 라벤스베르크(Ludvig Ravensberg)를 포함한 주요 노르웨이 후원자들이 기증을 이끌면서 노르웨이 모더니즘의 역사적 맥락을 꿸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죠.
2021년 10월 뭉크 미술관은 에스투디오 에레로스(Estudio Herreros)가 설계한 비요르비카(Bjørvika) 해안 지구의 새 건물로 이전했습니다. 무려 60m 높이 13층 새 건축물은 개관 당시 큰 화제를 모았죠. 수변의 랜드마크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크기 만큼이나 형태도 독특합니다. 하나의 큰 돌덩이처럼 보이는 모노리스(monolith) 형태의 디자인을 띄고 있거든요.
13층 높이 오피스 빌딩을 연상시키는 통유리 외관 건물은 바다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더군요. 모든 유명한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 또한 공개 직후 논란이 있었습니다. ‘못생겼다’는 비난을 받은거죠. 하지만 이 구부러진 모노리스는 ‘실존적 불안’을 상징하는 화가 뭉크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뭉크의 작업실과 생애를 소개하는 공간 ©김슬기
전시는 7개 공간에 걸쳐 이어지는데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층을 거듭해 오르다보면 12층에 닿게 됩니다. 레스토랑 입구가 있는 이 곳에서 내려다보는 오슬로 수변의 모습은 정말 감탄이 나왔습니다.
이전으로 규모가 5배나 커지면서 뭉크 미술관은 정체성에서 변화를 맞이했죠. 뭉크를 보존하고 연구하는 미술관에서, 뭉크 이후 노르웨이 미술의 미래를 고민하는 미술관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저는 이번 방문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상설 전시장을 관람하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키요시 야마모토를 비롯한 신진 작가의 특별전시가 다양하게 열리고 있었거든요.
지난 11월부터는 뭉크 트리엔날레가 개막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올해로 두 번째인 뭉크 트리엔날레는 예술과 기술에 중점을 두고 전시를 기획합니다. 2025년 주제인 <거의 언리얼(Almost Unreal)>은 신진 작가들을 대거 소개하며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점점 더 모호해지는 시대를 탐구하는 전시를 펼쳐보였습니다.
키요시 야마모토의 특별전 ©김슬기
인간 감정을 솔직하게 그려낸 표현주의 화가 뭉크
뭉크 미술관 전시장 내부 전경. ©Munchmuseet
뭉크는 60년이 넘게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 괴력의 화가였습니다. 1880년대에 데뷔할 때부터 1944년 사망할 때까지요. 이 미술관에 기증된 작품만 3만여점 가까이 되니 대단한 숫자입니다.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에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그는 병에 걸려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겨우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그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대신 집에서 교육을 받았죠.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신의 열정을 추구할 자유도 주어집니다. 그는 17살 때 일기에 이렇게 씁니다.
“이제 화가가 되는 것이 제 결정입니다.”
그의 삶을 시시콜콜 소개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삶에는 재미있는 지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뭉크의 빌라에는 늘 그림, 도구,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요. 그림은 야외에 보관되기도 했고, 작품에는 발자국과 새똥, 촛농 흔적도 발견됩니다. 열정적인 사진가였던 뭉크는 수많은 사진을 남겼으며, 그중 다수는 자화상이었을 만큼 ‘셀카’ 중독자였죠. 종종 싸움에 휘말릴 만큼 불같은 기질의 소유자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개는 아주 좋아해서, 폭스테리어인 피프스를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미술사적으로 뭉크는 1890년대 상징주의 운동의 일원이었다가, 1900년대 초반부터 표현주의 예술의 선구자로 변신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자유분방한 화풍의 변천과 열정은 그의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따라가면서 만나보면 더욱 감탄하게 됩니다.
Edvard Munch [Melancholy], 1900–01 ©Munchmuseet
그의 그림이 오늘날에도 설득력을 가지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뭉크의 그림이 당대에 비판적 평가를 받았던 이유 중에는 미완성으로 보인다는 점이 있었죠. 하지만 이 거칠고 미완성처럼 보이는 표현주의 화법은 인간 감정의 어두운 지점을 드러내는 점에서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는 홀로 선 존재의 다양한 측면을 집요할 정도로 그려냈습니다. 그는 우울과 고독을 탐구하는 화가였죠. 예술가 자신이 침잠하며 탐구했던 고독과 고립에 관한 시각은 21세기 현대인에게 큰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보면 우울함이란 감정을 그림에 담아낸 것은 르네상스 이후의 혁명적인 시도였습니다. 15세기 말까지 우울한 기질은 바람직하지 않고 고쳐져야 할 병증으로 여겨졌죠. 하지만 예술가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이었던 ‘멜랑콜리’는 점차 다양한 창작 활동과 연관되어 발전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신비로운 판화 <멜랑콜리아 I>에서 우울함을 시각적으로 의인화한 것으로 절정에 달했죠. 뭉크의 <멜랑콜리아> 또한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입니다.
Edvard Munch [The Sick Child], 1927 ©Munchmuseet
뭉크의 또 다른 특징은 병과 죽음에 집착했다는 점입니다. 뭉크가 14살 때, 누이 소피가 결핵으로 사망한 일을 겪었죠. 뭉크는 이 경험을 결코 잊지 못했고, 평생 이 주제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1885년에 처음으로 소피의 죽음을 그렸습니다. 그의 모델은 병약한 어린 소녀로, 아버지의 환자 중 한 명이었죠.
이 그림은 1886년 노르웨이 가을 박람회에 공개됐습니다. 몇몇 평론가들은 이 그림에 대해 혹독한 평가를 내렸죠. “자신의 작품을 손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몇몇 평론가는 이 어두운 그림에서 “멀리서 바라보면 슬픔과 고통이 느껴지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라 상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병든 아이>는 뭉크에게 돌파구가 되어 오늘날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됐습니다. 뭉크는 평생 이 모티프를 반복해 그렸고, 62세에 그린 작품은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6층 Edvard Munch Monumental 전시장에는 특별한 작품이 있는데요. 뭉크의 정말 집채만 한 초대형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태양(The Sun)> (1910~11) 및 <연구자들(The Researchers)>과 같은 이러한 대규모 작품은 1909년에서 1916년 사이에 오슬로 대학 강당을 위해 제작된, 뭉크 경력에서 가장 까다로운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바지선에 실어서 옮겼을 정도로 까다로운 ‘이사’를 거쳐 이곳에 소장됐습니다. 뭉크의 작품이 아무리 많은 미술관에 있다고 하더라도, 오슬로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 작품은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감정을 선사합니다. 오슬로에 온다면 놓쳐선 안될 볼거리입니다.
왼쪽 벽에 걸린 [태양(The Sun)]을 비롯한 초대형 작품이 걸린 6층. ©김슬기
뭉크의 절규를 만날 확률은 3분의 1
Edvard Munch [The Scream], 1910 ©Munchmuseet
절규의 방에서 숨어 있던 [절규]의 원화가 공개되는 순간의 관람객들. 모나리자 사이즈를 생각했다가 실제로는 커서 인상적이었다. ©김슬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작품 중 하나이자 불안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된 <절규(The Scream)>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제가 오슬로에 도착하자마자 이 곳을 처음으로 찾은 이유는 밤 9시까지 미술관이 문을 여는 탓도 있었지만, 스케치나 모작이 아닌 가장 유명한 <절규>의 오리지널 원화부터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1. 절규는 몇 점이 그려졌을까
뭉크의 절규는 해질녘 두 친구와 함께 한 산책에서 탄생했습니다. 바다를 물들인 노을에 뭉크는 강한 충격을 받았지만 그의 친구들은 무관심했죠. 그는 이 일을 종이에 몇 자의 메모와 이미지로 기록해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여러 버전의 <절규>가 탄생했습니다. 뭉크는 하늘의 패턴을 다양하게 표현한 석판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석판화가 인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 30개로 추정되며 뭉크가 손으로 채색한 것을 포함해 이 중 6개는 뭉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2.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아무도 몰라
<절규>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수수께끼입니다. 일그러진 인물에 대한 완벽한 해석은 존재하지 않죠.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표현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배경의 인물들은 비록 아주 작지만, 이 그림의 열쇠를 쥐고 있을지 모르죠.
뭉크가 세 사람을 직선의 길 위에 배치했습니다. 두 사람이 맹인도 귀머거리도 아니라면, 일그러진 인물의 비명에 반응할 수밖에 없을텐데, 뒤돌아보지 않고 있죠. 소통의 부재를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비명을 지르는 주인공은 뭉크 자신이며, 멈춰 주변을 둘러볼 때가 되었다고 외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3분의 1 확률로 만나는 절규
여러 버전의 <절규>가 제작되었지만 대다수가 매우 취약한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원화, 드로잉, 판화 모두가 불안정한 재료를 포함해, 극도로 어두운 조명과 온도 조절이 가능한 유리 상자 안에 보관됩니다.
미술관은 절규의 세 가지 대표작인 회화(템페라), 드로잉, 석판화의 세 가지 버전을 30분 간격으로 순환 전시됩니다. 미술관 문이 열린 낮 동안에도 이 그림들에게는 휴식이 보장되는 셈이죠. 세 작품 중 어떤 작품이 공개될지는 랜덤이라서 운이 없는 관람객은 원화를 보기 위해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뭉크 뮤지엄의 세 가지 버전 [절규] ©김슬기
<절규>는 노르웨이의 다른 미술관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장 초기 버전(1893년 작)은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으며, 또 다른 대표작인 <마돈나(Madonna)>와 <삶의 춤(The Dance of Life)> 등도 이 곳에서 만날 수 있죠.
사실 뭉크의 초상화전을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만나기도 했고, 취리히 미술관에서도 그의 대단한 컬렉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 다작의 화가였기에 유럽 미술관에서는 누구보다 쉽게 만날 수 있는 작가여서, 호기심이 크게 일지 않는 작가였습니다. 하지만 뭉크 미술관의 그의 방대한 작품과 굴곡진 인생 이야기를 만나고 나니 그를 다시 평가하게 됐습니다. 이제는 그의 작품을 마주치면 오슬로라는 도시가 떠오를 테고, 시간이 갈수록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런던에서 1년간 만나고 온 ‘유럽 미술관 도장 깨기’를 서울에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일경제신문 김슬기 기자가 유럽의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 비엔날레 이야기를 매주 배달합니다. 뉴스레터 [슬기로운 미술여행]의 지난 이야기는 다음 주소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museumexpress.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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