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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리도섬에 열린 제82회 베니스영화제에 ‘어쩔수가없다’로 초청받은 박찬욱 감독. [AFP·연합뉴스]



돌아보건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오랜 화두는 ‘폭력의 악순환’이었습니다.

피는 피를 부 외환카드 만원의행복 르고, 죽음은 죽음을 부르는 ‘폭력의 굴레’. 그의 주제의식은 과거 ‘복수 3부작’으로 구체화된 바 있고, 다양한 변주를 거쳤다 해도 폭력의 불가피성은 언제나 그의 영화 안팎을 배회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의 영화는 대개 ‘개인’의 피였고, 사인(私人) 간의 다툼이나 원한이 주된 원인이었지요. 그런데 이번 박 감독의 3년 만의 신작 학원사업자 ‘어쩔수가없다’는 폭력이 개인화되지 않고 사회화되는 차별점을 가진 영화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회적 죽음’인 해고와 실직, 저 거대한 폭력이 부르는 연쇄살인을 주제 삼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제82회 베니스영화 황금사자상 후보(경쟁 부문)에 오른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현지에서 드디어 공개됐습니다. 지난 29일(현지시간) 베 전세자금대출 상환 니스영화제 본당인 ‘팔라초 델 치네마’의 제1극장 ‘살라 그란데’에서 박 감독의 3년 만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를 살펴봤습니다.



2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 팔라초 델 치네마에서 개최된 ‘어쩔수가없다’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에 참석한 박찬욱 감독, 배우 이병헌·손예 한국주택 진·박희순·이성민(왼쪽부터). 이날 상영 직후의 모습으로 9분간의 기립박수와 환호가 나왔습니다. [김유태 기자]





‘어쩔수가없다’의 만수 역을 맡은 배우 이병헌. 해고로 실직한 그는 재취업을 위해 분투하지만 매번 낙방하자 자신의 취업 은행 사업자대출 경쟁자를 살해하기로 결심합니다. [CJ ENM]



제지업체 ‘태양’에서 25년 근속한 만수(이병헌)가 해고됩니다.

안온했던 삶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충격이 밀려옵니다. 3개월 내 재취업을 다짐하지만 기대는 늘 어긋나고, 이력서를 내고 면접장에서 애를 써봐도 탈락이 반복됩니다. 한 근무처에서 ‘베테랑’ 소리를 들을 만큼 전문지식과 경험을 충실히 쌓았던 남편의 수입이 ‘제로’가 되자, 아내 미리(손예진) 역시 하루하루가 지옥입니다다. 생계가 곤란해질 지경이 됐기 때문입니다. 집안 물품을 중고 플랫폼 ‘당근’에 내다 팔아야 하는 신세까지 몰리고, 딸아이 첼로 레슨비까지 끊어야 할 판이니 가정 내 불화도 점점 심각해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고는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인 ‘사회적 살인’과 같았고, 특히 만수에게 실직은 자기 존재 자체를 휘발시키는 경험이었습니다.
재취업이 난망하니, 만수는 정신질환에 걸리기 직전까지 갑니다.
그러던 중에 만수는 다짐합니다. 본인의 재취업을 막는 동종업계의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말입니다. 강도짓을 해서 돈을 벌자니 검거될 게 뻔한데, 저 녀석들 때문에 자꾸 면접에서 미끄러지니, 몇 명만 조용히 제거하면 재취업이 무난해지고 가족과 정든 집을 지킬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어쩔수가없다’에서 만수의 아내 미리 역을 맡은 배우 손예진. 그녀는 만수를 위로하지만 면접 간다던 남편이 연쇄살인을 저질렀음을 알지 못합니다. [CJ ENM]



만수의 계획은 이제부터 치밀해집니다. 그는 꾀를 내어 ‘제지 분야 경력직원 채용 공고’를 허위로 냅니다. 그 결과, 자신보다 조건이 월등한 경쟁자들, 그러나 전국에 몇 명 되지 않는 후보가 압축됩니다. 만수는 그들의 이력서를 검토한 뒤 종이에 적힌 개인정보를 참고해 살인계획을 짜기 시작합니다.

베트남전쟁 참전 용사였던 부친이 베트콩에게서 빼앗아 기념으로 가져온 권총 한 자루가 만수의 연쇄살인을 도와줄 든든한 무기였지요. 하지만 첫발의 총성을 시작으로, 자꾸만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만수는 경쟁자 제거와 자신의 재취업을 해낼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가 ‘어쩔수가없다’의 초반부 줄거리입니다.



만수는 허위로 경력직원 채용 공고를 내고 이력서에 나온 정보를 토대로 자신의 취업 경쟁자를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사진은 범모 역의 배우 이성민(왼쪽), 시조 역의 배우 차승원. 두 사람은 만수의 강력한 경쟁자였습니다. [CJ ENM]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미국 범죄소설을 전문적으로 써온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동명 소설 ‘액스(The Ax)’를 원작 삼은 작품입니다. 한국에도 세 차례에 걸쳐 번역 출간된 바 있는 책으로, 탄탄한 마니아층을 가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어쩔수가없다’에 앞서 2005년 프랑스의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먼저 제작되기도 했는데, 20년 전 영화인 ‘액스’ 프랑스판이 원작 소설 ‘액스’의 서사 전개 방향을 충실히 따르는 반면, 이번 박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피해자의 상황, 살인에 쓰이는 도구, 현장의 정황이 모두 다르게 각색돼 전혀 새로운 서사가 완성됐습니다.

특히 만수 자신이 ‘죽여야만’ 하는 피해자들과의 공감대(해고된 자로서의 설움과 울분)가 형성되면서 살인계획이 틀어질 뻔하지요. 소설에는 설정이 가득합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원작인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도끼)’ 판본들. 한국에선 3회 출간됐습니다. 왼쪽부터 1998년 밀알 출판사 판본, 2011년 그책 출판사 판본, 그리고 2017년 오픈하우스 출판사 판본. 현재는 모든 판본이 절판됐고 중고시장에서도 희귀본입니다. 위 책들은 한 대학 도서관에서 확인했습니다. [김유태 기자]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2005년작 ‘액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동명 소설을 원작 삼았는데 ‘어쩔수가없다’와 달리 소설의 서사를 충실히 뒤따릅니다. 기본 설정은 같지만 ‘어쩔수가없다’와는 결이 많이 다릅니다. [IMDb]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2005년작 ‘액스’의 한 장면. 한 아내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인 주인공의 살인을 다룹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켜야 하는 절박함이 그려진 영화입니다. [IMDb]



그러나 ‘어쩔수가없다’는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실직, 해고, 연쇄살인이라는 심각한 주제임에도 박찬욱 감독만의 블랙유머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날 밤 10시경 월드 프리미어 상영(공식 상영)이 열리기 전인 이날 오전 11시경 ‘어쩔수가없다’ 프레스 상영회에서는 139분에 달하는 상영시간 동안 폭소가 적어도 30번 이상 이어졌습니다.

한국인만 알 수 있는 유머란 생각이 드는데도 외국인들에게도 ‘통하는’ 유머들이었던 것이지요.
특히 일부 신체 난투극 신 직후엔 무려 10초 넘게 환호와 박수가 터질 정도로 관객들의 몰입감이 컸습니다. 만수가 취직을 원하는 새 회사의 이름이 제지업체 ‘문(Moon) 제지’라는 점도 언어유희를 극대화했습니다(‘문제지’). 작명 하나에도 세심하게 신경 쓴 연출자의 깊은, 그러나 유쾌한 고민이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베네치아영화제를 찾은 ‘어쩔수가없다’의 감독과 배우들. 왼쪽부터 배우 이성민·박희순·손에진, 박찬욱 감독, 배우 이병헌·염혜란. [로이터·연합뉴스]



이쯤 되면 왜 만수가 일하는 업체가 하필 ‘종이’를 다루는 제지업체였는지도 곱씹게 됩니다.

종이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규격화된, 노동현장의 상징적인 물건으로 통하지요. 그러나 사용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구겨버리면 그만인, 게다가 쉽게 젖고 쉽게 찢기는 ‘하찮은’ 사물이 종이이기도 합니다. 또 종이의 원료는 나무가 아니던가요. 제지산업에 사용되는 종이는 ‘한 공간의 숲에서 자란 나무를 베고, 다시 그곳에 대체할 나무를 심어 완성된다’고 이 영화는 극중 설명하고 있습니다.
찢거나 구긴 뒤 새로 꺼내면 그만인 종이와, 베어버리고 새로 심으면 그만인 나무는, 그 자체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인간 존재를 환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대체재가 된 인간을 떠올리게 만드니까요.
더욱이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원작 소설이나 2005년 동명 영화 ‘액스’를 넘어서서, 인공지능(AI) 시대의 노동자 처지까지도 감지해냅니다. 인공지능 시대엔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고 오직 필요한 인력은 ‘중간 관리자’뿐이라지요. 만수가 노리는 자리도 전면 자동화된 공장에서의 관리자직이니, ‘리사이클’되지 않아 사용가치가 감소해 종이나 나무보다도 못한 인간 현실을 이 영화는 체계적으로 대변합니다.



제82회 베니스영화제에 참석한 ‘어쩔수가없다’의 주연 배우 손예진. 그가 맡은 배역인 미리는 남편 만수의 해고로 인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합니다. [로이터·연합뉴스]



만수를 비롯해 극중 캐릭터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다”는 대사를 반복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어쩔 수가 없다’란 말은 하나의 주문(呪文)과 같습니다. 자신의 불의한 선택을 합리화할 때 주로 내뱉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자세히 보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전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던 부조리한 세계 속의 약자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이 세계는 어쩔 수가 없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집합체이며 우리 자신도 모두 조금씩은 모두가 만수의 신세다’란 깨달음을 줍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 ‘No Other Choice’에 기댄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이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인 셈이지요. 만수는 결국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교차하는 방정식, 이 고차함수를 박찬욱 감독은 특유의 서늘한 블랙유머로 소화해냈습니다.
‘어쩔수가없다’는 경쟁 부문에 진출한 다른 20편의 영화와 경합 중입니다. 영화 전문 매체 스크린데일리는 이날 ‘어쩔수가없다’ 리뷰 기사에서 “범죄 행각은 다소 서툴러 보일지 모르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 제작은 그 어느 때보다 우아하며, 심리적 긴장감과 유쾌하고 코믹한 설정 사이의 균형을 이뤘다”고 호평했습니다. 다만 후반부의 단조로움 등 단점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상영 직후엔 9분간의 기립박수가 나왔습니다. 영국 가디언지의 피터 브래드쇼는 주요 영화제 직후 작품마다 평점(5점 만점)을 매기는데, ‘어쩔수가없다’엔 4점을 줬습니다. 현재까지 공개된 작품들 가운데 1위입니다(올해 베니스영화제 개막작 ‘라 그라치아’와 공동 1위).
수상 결과는 9월 6일(현지시간, 한국시간 7일 새벽) 베니스영화제 폐막식에서 발표됩니다. 그날, 박찬욱 감독의 손에 트로피가 허락될까요.



29일(현지시간) 제82회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리도섬의 ‘팔라초 델 치네마’의 모습. [김유태 기자]





박찬욱 감독 ‘어쩔수가없다’의 베니스영화제 상영 티켓.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