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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에너지 등 첨단 기술이 정치와 외교를 움직이고 평범한 일상을 바꿔 놓는다. 기술이 패권이 되고 상식이 되는 시대다. 한국일보는 최신 이슈와 관련된 다양한 기술들의 숨은 의미를 찾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심층 분석하는 '테크 인사이트(Tech Insight)'를 격주 금요일 연재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가상화폐 스테이블 코인의 규제 틀을 마련한 지니어스 법에 정식 서명한 문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워싱턴=AFP연합뉴스


“인터넷 회생신청자격 탄생 이래 가장 위대한 금융기술 혁명.”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8일(현지시간) 스테이블 코인 규제 체계인 '지니어스 법'에 서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법 통과로 가상화폐는 그림자 신세에서 벗어나 현물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됐다. 그러나 스테이블 코인이 실제로 ‘안정성’을 확보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내재가치가 없고 사이버 위협에 노출된 가상 자동차 현금구매 자산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최근 “스테이블 코인은 시장에서 준비자산과 동일한 가치로 거래된 경우가 거의 없다”며 높은 변동성을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액면가 만큼 현물자산 준비, '인위적 상품권'
스테이블 코인은 ‘상품권’으로 비유된다. 1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을 신한수협 같은 가격의 현금처럼 쓸 수 있듯이, 스테이블 코인 역시 동일한 가격의 법정화폐처럼 쓸 수 있다. 교환과 결제, 송금이 현금보다 빠르고 수수료도 낮은게 장점이다. 단, 발행사가 코인 가격만큼의 자산을 준비하는 ‘자산가치 연동(페깅・Pegging)’이 안정성의 핵심이다.
스테이블 코인을 논의할 때 흔히 언급되는 사례는 2022년 세계를 떠들 신한은행 적격대출 석하게 한 테라·루나 폭락 사태다. 21대 대선 당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원화 기반 스테이블 코인 발행 공약을 비판하며 이 사건을 언급했다. 하지만 테라·루나는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이라, 최근 논의되는 자산 기반 스테이블 코인과는 태생이 다르다.
테라는 가격을 1달러로 유지한다면서도 달러를 담보로 새마을금고 자소서 첨삭 하는 대신, 보조 코인인 루나와의 차익 거래를 이용해 이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원인 불명의 테라 대량 투매가 일어나면서 이 메커니즘은 무너졌다. 당시 블록체인상의(온체인) 데이터 분석을 통해 사태를 예견했던 조재우 한성대 교수(블록체인연구소장)는 “사고 이후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은 거의 사라졌고, 현재 남아 있는 것도 자산 기반과 알고리즘의 혼합 방식”이라고 말했다.



2022년 테라·루나 사태 당시 폭락했던 테라 가격 추이. 코인마켓캡 캡처



외부 연결 데이터 탓 안정성 흔들릴 수도
지니어스 법을 비롯한 각국의 규제는 스테이블 코인에 일대일 비율로 준비자산을 연동할 의무를 부과해 안정성을 관리한다. 그러나 스테이블 코인 역시 블록체인 기반 가상화폐인 만큼 기술 오류나 보안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홍콩시립대 연구진이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스테이블 코인 관련 사고 중 피해액이 10만 달러(약 1억4,000만 원) 이상인 44건을 분석한 결과, 사고 원인 중 코드 취약성(38.64%)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블록체인 기술의 핵심인 ‘스마트 컨트랙트' 알고리즘1 관련 오류가 생기거나 이를 공격자가 악용하는 것이다.



그래픽=이지원 기자


가치 연동이 필수인 스테이블 코인의 구조 탓에 비트코인과는 다른 취약점도 생긴다. 자산 가격이나 담보 상태 같은 외부 정보를 스테이블 코인에 연결하는 장치인 '오라클’이 대표적이다. 안랩블록체인컴퍼니 관계자는 “오라클이 공격을 받아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면 스테이블 코인의 가치 연동이 실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코인 자체에 문제가 없어도 오라클의 데이터가 해킹되면 자산 안정성이 크게 요동칠 수 있는 것이다.
특정 스테이블 코인을 이더리움 등 다른 구조의 가상자산으로 변환하고 이동시키는 중간자인 ‘브릿지’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변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대량의 잠긴 자금을 보유하는 데다, 검증 시스템의 취약성 때문에 최근 해커들의 주된 표적이 됐다. 조 교수는 “브릿지는 가급적 피하는 게 낫고, 테더도 공식적으로 브릿지를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스테이블 코인 자체의 안전장치도 보안 난도를 높인다. 안랩블록체인컴퍼니 관계자는 “송금과 보관이 주된 기능인 일반 가상자산과 달리 스테이블 코인은 문제가 생겼을 때 정해진 조건에 따라 자산을 회수하거나(청산) 시세 관리를 위해 일부 코인을 폐기하는(소각) 로직이 있어 구조가 훨씬 복잡하다”고 설명했다.
스테이블 코인의 특성이 오히려 불법 금융의 판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범죄자들 역시 스테이블 코인의 상대적인 가격 안정성과 낮은 수수료, 익명성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미국 블록체인 분석기업 체인 애널리시스의 '2025크립토 범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가상자산을 통한 불법 거래의 63%에 스테이블 코인이 이용됐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도 지난해 보고서에서 “2024년 이후 북한 관련 행위자와 테러 자금 조달자의 스테이블 코인 활용이 증가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리스크 탐지할 온체인 분석 기술 필요
‘휴먼 리스크’도 무시할 수 없다. 발행사의 부정이나 실수, 자산 수탁기관의 부도 등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동이다. 실제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당시 미국 USD코인의 준비금이 묶여 투자자들의 우려로 가격이 폭락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3년 1~11월 상위 30개 스테이블 코인에 600건 이상의 디페깅(기준가격 탈피)이 발생했다. 홍콩시립대 연구에서도 가격 변동이 사고로 이어진 경우가 31.77%였다. 이 중엔 의도적인 가격 조작(4.55%)도 포함됐다. 또 다른 인재(人災)인 ‘러그풀’도 9.09%다. 코인을 발행하겠다며 투자 받은 뒤 프로젝트를 완료하지 않고 사라지는 일종의 ‘먹튀’다.



2023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실리콘밸리은행 본사 앞에 예금을 인출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각국은 리스크를 관리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 중이다. 지니어스 법에 따르면 발행자는 매월 지급준비금을 증명하고, 자금세탁방지(AML)와 고객확인의무(KYC) 이행을 위한 관리 체계를 갖춰야 한다. 이는 국내 법제화 과정에서도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스테이블 코인 시장 규모가 더 커지고 거래소를 넘어 현실 지급 수단으로 쓰이려면 안전장치가 더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국은행의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실험에 참여한 블록체인 기업 지크립토의 김봉규 전무는 “발행량 조작 같은 공격이 일어나면 바로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월별 공시를 넘어 실시간으로 준비금을 검증할 기술 적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BIS도 “금융 범죄를 추적하고는 있지만,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수십 억 건의 결제에서 자금세탁 여부를 확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인공지능(AI)을 접목한 관리 기술이 등장하는 추세다. 실시간으로 블록체인에 기록된 거래 데이터를 분석해 자금세탁과 사기 징후를 탐지하는 것이다. 기존 온체인 분석 기반의 기술 감시를 AI로 자동화하는 건데, 글로벌 블록체인 보안 기업 서틱이나 체인애널리시스가 이미 활용 중이다.
국내에서도 원화 스테이블 코인 도입 논의와 함께 보안 시장이 들썩이고 있지만, 핵심인 온체인 분석 기술 수준은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테라·루나 사태 이후 블록체인에 대한 관심이 식고 관련 연구도 주춤한 탓이다. 조 교수는 “관련 연구를 하던 기업들이 최근 자금난으로 인력을 줄이는 등 많이 위축됐다”며 “금융당국의 모니터링 필요성도 커지는 만큼 스테이블 코인 도입 과정에 기술과 인재를 확대하는 방안도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 ‘스마트 컨트랙트' 알고리즘


블록체인에서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계약을 실행하고 관리하는 코드. 계약의 효율성과 신뢰도를 높이지만, 오류가 생기면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