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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서 종종 보는 북미 지역 단체 ‘성난 할머니들’의 데모는 늘 흥겹다. 나이 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롱하듯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파시즘에 반대하는 패션 리더들’이라는 손팻말을 흔들며 거리에 나선다.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며 트럼프 대통령에 저항하는 ‘노 킹스 데이’에 참여하고,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시위를 벌인다. 이라크전쟁 때인 2005년에는 ‘우리가 이라크에 커리어우먼 갈 테니 젊은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하며 입대를 시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할머니들은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존재가 된 듯하다. 2024년 유럽인권재판소가 기후변화에 정부가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것은 인권침해라는 기념비적 판결을 낸 것도 스위스의 ‘기후 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 회원들이 소송을 낸 결과다. 핀 케이비캐피탈 란드에서는 은퇴한 여성들이 손주들로부터 “할머니, 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요?”라는 질문을 받고 싶지 않다며 ‘활동가 할머니’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2019년 12명이 시작한 이 모임은 현재 수천명의 회원이 있는 커뮤니티로 성장했고 청년과 연대해 기후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펼친다. 오늘날의 굳세고 위엄스러운 할머니들은 수십년간 축적 뉴스타 한 삶의 기술과 인내심, 유대감을 바탕으로 약자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치열하게 나선다.



전기, 밀양-서울, 김영희 지음, 교육공동체벗(2024)


우리에게도 ‘밀양 할매’가 있다. 국문학자 김영희가 쓴 ‘전기, 밀양 현재은행금리 -서울’은 2014년부터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의 구술 인터뷰와 현지 조사를 통해 이 운동의 의미를 짚은 책이다.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탈핵 이슈를 주요 의제로 제기한 이 운동의 시작 단계에선 “지역의 권위 있는 남성들”이 전면에 섰지만, 끝까지 그 어떤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싸움의 현장에 남은 이들은 ‘밀양 할매’ 저축은행후순위대출 들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밀양 할매’를 “귀엽고 순박한 이미지의 할머니가 아니라 탈송전탑 탈핵 운동가이자 에너지 정의를 실천하는 활동가를 부르는 이름”이라고 정의한다.
책에는 송전탑 건설 과정의 폭력이 상세히 기록돼 있는데,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처참해진다. 한국전력은 송전탑 건설에 대한 설명, 보상금 및 합의금 지급의 정확한 기준과 지침을 제시하지 않았고, 주민들이 알아야 할 주요 정보는 모두 소문으로 떠돌았다. 돈을 앞세워 주민들을 이간질하고 인간적 자존감을 공격하는 폭력 앞에서 수십년간 이어져온 마을의 전통과 공동체의 가치는 속수무책으로 일그러졌다. 누구에게나 가장 힘든 일은 가까웠던 사람과 척지는 일일 텐데, 주민들은 이웃 관계의 파탄으로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다.
이 책에는 ‘나랏일’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국가폭력과 한국전력의 만행을 고발하는 내용이 빼곡하지만, 그럴수록 폭력이 휩쓸어버린 폐허에서 삶을 가꾸는 ‘밀양 할매’들의 모습이 더욱 반짝거렸다.



2013년 12월1일 오전 경남 밀양시 상동면 도곡리 고정저수지에서 열린 송전탑 반대 시위에 밀양 할매들이 참석해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밀양 할매’들은 송전탑 건설 예정지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했는데, 할 수 있는 건 “베어질 나무를 끌어안고 버티는 것, 포크레인 안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 곧 다져질 땅을 파고 들어가 누워 있는 것”이 전부였다. 70~80대 할머니들이 짐승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산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버티면서 용역과 경찰의 폭력에 맞섰고, “짓밟히지 않는 마음으로 미래와 자연을 걱정”했다.
할머니들은 어떻게 그토록 현명할 수 있었을까. 크레파스로 송전탑을 그리던 할머니는 송전탑 옆에 꽃과 나무와 새와 벌들을 그려 넣으면서 저자에게 “이들이 이 산의 진짜 주인”이라고 말했다.
“소나무가 진짜 주인이지. 그라이 송전탑 뽑아뿔고 그 주인들한테 땅을 돌리주야 하는 기라. 우리 태어나기도 전에 가-들은 그-서 살았고, 우리가 죽고 나서도 그-서 살 끼니께네.”
할머니들에게는 땅은 모든 생명의 터전이며 인간도 그 생명 가운데 일부일 뿐이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드넓은 시각과 어른의 책임감”이 있었다.
할머니들은 또 어떻게 그렇게 강인할 수 있었을까. 2014년 대대적 행정대집행으로 천막이 철거되고 산에서 쫓겨났을 때도 70대 할머니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했으니 실망할 게 아니라고 말했다.
“집에 가서 정신 차려가지고, 그 이튿날 내가 미장원에 가서 머리 치뿌고(잘라버리고), 새로 우리는, 여기서 좌절하고 주저앉으면 안 되거든. ‘해야 된다’ 그래서 새로 시작했어요.”
밀양의 싸움과 연대를 기억하는 이들이 저자와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말한 것은 “할매들이 만들어 준 밥”이었다. 고도 500m의 깊은 산 속에서 농성하면서 할머니들은 낡은 양은 냄비에 된장찌개를 끓이고 진달래를 따다 화전을 부치고 연탄불에 고등어를 구워 먼 곳에서 연대하러 온 사람들을 먹였다.
밀양에는 기어이 송전탑이 들어섰다. 할머니들은 패배한 것일까. 한 80대 할머니는 ‘지는 싸움’이 아니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사 살날이 얼마 안 되고,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뽑히면 그만이지. 느그가 할 거잖아. 나는 걱정 안 한다. 그라이 지는 싸움도 아니지.”
자신의 싸움에서 멈추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다음 세대와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삶의 지평을 넓혀낸 이 어른을 닮고 싶어졌다. ‘밀양 할매’들은 한두분씩 세상을 뜨지만, 뜻은 계속 이어진다. 지금 순천에서는 ‘순천밀양 바느질방 모임’이 열린다. 산속 농성장에서 ‘밀양 할매’들과 함께 하던 바느질이 모임의 뿌리다. 할머니들의 연대가 만들어낸 삶의 힘은 이렇게 지속된다.
김희경 전 여성가족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