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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훨씬 그 말했다. 사냥꾼. 쉬지도 그있던 꽃을 더 아름답게 하는 것도, 그렇다고 꽃밭의 위상을 높이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쓸데없고 무용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당의 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 생각하느라 가을 한철을 거의 다 보내고 있었다.
궁리 끝에, 시인 안도현은 마사토 한 트럭을 주문했다. 40년 동안 거주했던 전주를 떠나 고향인 예천으로 돌아온 뒤 텃밭을 가꾸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상을 보내오던 그였다. 정년이 몇 해 남았음에도 지난 2월말로 교수직까지 그만둔 그는, 덤프트럭이 마당에 부어놓은 마사토를 삽으로 떠 꽃밭에 넣은 뒤 돌을 고르고 있었다.
이때 동네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친구가 찾아오면서 의도치 않은 수작을 벌이게 된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사느라 만나지 못하다가 귀향한 뒤 다시 만난 농사 친구였다. 불교 선문답 같은 두 사람의 대화는 마지막에 깜짝 놀랄 반전을 맞는다. 툭, 하고 한 편의 시가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꽃밭에 들어가 돌을 골라내고 있는데 동무가 왔다/ 꽃밭을 높여보려 황금성게임랜드 고 한다니까/ 시인은 원래 이렇게 쓸데없는 일 하는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 꽃들의 키를 높이는 일, 그거/ 쓸데없는 일이지, 혼자 중얼거렸다/ 서리 오기 전에 배추나 서둘러 뽑으라 하였다//나는 다음에 톱밥이나 한 포대 사다달라고 부탁하였다/ 톱밥은 뭐에다 쓸라꼬?/ 닭똥 치우고 나서 거기 깔아주려고 하네/ 그러자 이제는 병아리 키 높이는 일을 하려고 하 바다이야기게임방법 는구먼, 하고 웃었다/ 나는 동무에게 자네도 시인 다 되었네, 하였다”(「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 부문)
애송시 「너에게 묻는다」를 비롯해 소박한 일상과 자연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섬세한 감성과 따뜻한 시선의 시인 안도현(64)이 「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를 비롯해 71편의 시를 묶은 신작 시집 『 야마토게임예시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문학동네)를 발표했다. 전작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이후 5년 만으로, 그의 12번째 신작 시집이다.
안 시인은 4부로 이뤄진 이번 시집 사이다쿨 에 작고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은 시편부터 귀향 이후의 일상을 다룬 작품과, ‘북’의 이미지를 담은 시편 등을 담았다. 전주에서 예천으로 귀향하고, 어머니가 작고하고, 생전 처음 병원을 드나들고, 오래 밥을 빌던 학교를 그만둔 뒤 삶의 궤적과 닿아 있다.
그는 이들 시편을 통해 무엇이 쓸데없고 의미 없는 일이고, 무엇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존재인지,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지를 곱씹게 한다. 즉, “정말 약한 것들의 편에 서서 노래를 불렀을까”(「순간 정지」) 하고 성찰하기도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을 쓰고 나니/ 나는 더 편안해졌다”(「연민」)고 느끼기도 하며, “나는 쓸모없는 걱정을 하다가 가장 쓸모없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라는 생각도 한다”(「흰목물떼새」).
시인 안도현은 왜 작고 쓸모없고 의미 없는 존재들에 주목하게 된 것일까. 그가 보고 느끼고 그린 작고 쓸모없는 존재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안 시인을 지난달 30일 문자 메시지와 전화로 만났다.
―이번 시집에선 자유자재의 어떤 시적 경지가 느껴지는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
“거의 평생을 아파트라는 허공의 둥지에서 살다가 5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땅에 착지를 하고 살게 되었다. 마당과 텃밭과 연못과 돌담이 일상이 되니,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더라. 아침마다 창을 열면 새소리가 무진장 쏟아져 들어오는데, 이 새소리를 보자기에 싸서 누구에게 좀 보낼까 싶을 때도 많았다. 저는 1980년대 이후 꽤 오랜 동안 시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면서 시인으로서 어떤 의무감을 지고 살아왔다. 그 무게를 지금은 덜 느끼는 편인데, 말 하나하나의 빛깔과 물기를 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마주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렇다고 도통한 척 하려는 건 아니다. 앞으로도 시를 쓰는 저보다 제게 오는 언어를 더 잘 모시고 그 언어를 덜 간섭하고 잘 따라가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왜 ‘오는 언어를 더 잘 모시고 따라가도록 내버려두고 싶다’는 마음에 이른 것인가.
“시인이 자신의 애초의 의도를 시에 욱여넣으려고 할수록 언어는 달아난다. 의도의 과잉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볼품없는 시를 낳는다. 그렇게 되면 시인은 만족할지 몰라도 독자는 그 언어에 집중하지 않는다. 시인이 시를 이끌고 가는 주도자가 되려고 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 저는 시를 쓰는 자아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야 한다. 그래야 그때 시인 바깥에 있던 언어가 시인에게 들어온다. 자신의 언어를 자신이 소유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더니 언어가 쏟아져 들어오고 저 스스로 자유로워지더라. 좀 과장해서 말하면 쓸데없이 눈부시게, 혹은 찬란하게.”
시집은 투병 끝에 최근 작고한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담은 시편으로 문을 연다. 1939년 일본 구로사키에서 태어난 어머니 임홍교 여사는 그의 귀향을 기다리던 중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팬데믹 시절 두꺼운 유리문 안에 갇혀 있다가 작고했다. 다만 그가 모친과의 이별에서 오로지 슬픔과 아쉬움만을 발견한 건 아니었다. 어머니가 작고한 뒤에 글이나 행동이 더 자유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그는 고백한다.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내고 면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지웠어요// 저는 이제 물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었어요/ 쨍한 코끝으로 연못 위에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연못 위에 쓰다」 부문)
―작고한 어머니를 노래한 시편이 적지 않은데.
“어머니의 죽음을 시를 쓰는 자식으로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지난 몇 년 동안의 숙제였다. 어머니는 마흔두 살에 남편을 잃고 아들 넷을 고생하면서 키운 분이시다. 그 신고의 삶에게 바치는 나의 언어는 어떤 꼴을 해야 하는가,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그 순간의 거리는 얼마인가, 사적인 체험과 객관적인 평정심의 관계는 어찌 설정해야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쓰게 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역시 예천으로의 귀향 이후 일상을 다룬 시편들이다. 닭을 키우고(「장닭」), 풀을 뽑다가 벌에 쏘이거나(「벌에 쏘인 이야기」), 유리창에 부딪혀 죽은 물총새를 땅에 묻거나(「간단하고 명료한」), 장에 나가 열무씨를 사는(「열무씨 이천원어치에 대하여」) 시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눈이 게으른 새떼처럼 오고 있다// 나는 돌배나무 아래 들어 천지에 꽃망울 뒤척이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고 손으로 눈을 받았다고 쓴다, 손금이 눈송이를 튕겨올렸다고 쓴다// 냇가에 사는 흰목물떼새가 마당 안까지 냇물을 끌고 왔다 새는 목덜미가 하얘질 때까지 울었는데 울음소리가 가볍다// 새야, 구절초 씨앗 뿌려놓은 꽃밭은 기웃거리지 말아라 씨앗을 다 쪼아먹으면 나는 내후년 가을에 어떡하노?// 나는 쓸모없는 걱정을 하다가 가장 쓸모없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라는 생각도 한다// 땅에 떨어진 깃털이 새의 윤곽이라는 말을 들었다, 라고 쓴다”(「흰목물떼새」 전문)
―어느 겨울 끝자락에 만난 「흰목물떼새」의 노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절창이다.
“예천 집 앞에 내성천이라는 낙동강 지류가 흐른다. 예전에는 은모래가 눈부시던 강이었다. 해마다 4월이 되면 멸종위기종인 흰목물떼새가 강변 자갈밭에 알을 낳아둔 것을 산책하다가 가끔 본다. 외부 침입자로부터 알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울음소리, 별난 행동도 조금 알고. 흰목물떼새는 자갈밭에 자갈 모양과 빛깔과 유사한 알을 낳는데, 그게 너무 신기해 첫해는 여러 차례 알을 보러 나갔다. 지인들을 데리고 가서 보여주기도 했고. 그런데 부화 시기가 지났는데도 알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더라. 어미는 보이지 않고. 그게 틀림없이 지나치게 관심을 보인 제 탓이라고 저는 생각했다. 인간인 제가 새의 부화를 방해한 죄인이 된 것이다. 새와 저의 관계를 비롯해 닭장에서 십여 마리 키우는 닭들과의 거리, 길가의 산국꽃과 저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시를 쓰고 싶을 때가 많아진다. 「장닭」이라는 시도 실제 있었던 이야기다.”
시집에는 또 제목에 ‘북’이 들어가거나 본문에 ‘북’을 언급한 작품도 10여 편에 이른다. 여기에서 일부 ‘북’은 실제 북한과 연루되기도 한다. 일찍이 『북항』(2012)이라는 시집을 냈고, 스스로 평양을 대여섯 차례 다녀오기도 한 시인이다.
“북천은 바로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손 뻗으면 닿는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만질 수는 없지만 보이는 곳에 있어요 북천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쌓아둘 수도 없지만 북천은 부서지지 않고 흘러내리지 않고 물렁거리지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요 북천은 비누처럼 미끌거리고 대파처럼 맵싸하고 비스킷처럼 바삭거려요 이 의미 없이 좋은 북천”(「북천」 부문)
―북문, 북촌, 북산, 북당, 북행 등 ‘북(北)’ 이미지가 집중적으로 배치돼 눈길을 끄는데.
“‘북’은 북쪽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무서운 이데올로기를 떠올리게 하는 묘한 말이다. ‘북’이라는 말에 갇히기 싫어서 더 ‘북’을 불러 보고 적어보고 싶었다. 말의 억압으로부터 회피하는 것보다 억압을 주는 말 속으로 자꾸 들어가 본 것이다. 그랬더니 예상외의 소득이 있었다. ‘북’을 경계하고 거기에 주눅 들어 있던 마음이 정말 편해졌다.”
―결국 이번 시집은 작고 의미 없고 쓸모없는 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아지는 것 같다.
“어떤 의미를 생산하고 전파하기 위해 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이나 철학이나 윤리 교과서가 담당해야 할 영역이다. 시인은 의미를 규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의 감각을 질문하는 사람이다. 의미의 감각이란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의 상태, 의미의 울타리에 갇히기 직전의 상태를 말하는데, 그 감각을 지닌 게 언어다. 언어가 머무는 곳은 세상의 상층부가 아니라 쓸모없다고 여기는 것에 오히려 더 오래 깃들게 마련이다.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할 수 없고 산업의 잣대로 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영역이다. 귀향 후 시골 골짜기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돌멩이 하나, 길지 않은 노끈 한 가닥, 텃밭 오이꽃의 빛깔, 길고양이의 울음소리 들이 모두 하나같이 쓸모없는 것 같아 보여도 소중하게 여겨지더라.”
초등학교 6학년 때 대구로 전학하면서 사촌 형들과 자취를 하게 됐다. 친구와 사촌형들이 TV를 볼 때, 그는 TV 대신 책을 읽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느끼게 되는 어떤 그리움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을 일찍 깨닫게 됐고, 이 같은 결핍의 감정은 그를 자연스럽게 문학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고교 2학년 시절 가입한 학교 문예부 활동이 결정적이었다. 동기 선후배와 함께 시와 문학을 읽고 공부하며 관심과 애정을 키워갔다. 각종 백일장과 문예현상 공모에도 응모해 많은 상을 휩쓸며 소년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시인 안도현의 씨가 뿌려지던 순간이었다.
“1970년대 후반 대구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시를 읽었더니 시가 쓰고 싶어졌고, ‘현실 너머’를 상상하고 거기에 다다르는 언어를 찾게 되었습니다. 오래 시를 쓰고 시를 가르치는 현장에도 있었지만 내가 구사하는 언어를 항상 갱신해야 한다는 생각은 평생 숙제처럼 안고 살아요.”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학교 수업이 휴강되자, 대학 1학년생 안도현은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 밤,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무릎이 꿇린 채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다. 이 사건을 겪은 뒤 문학주의자였던 그는 세상과 문학을 새롭게 보게 됐다.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안도현은 시 「낙동강」이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시작으로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기러기는 차갑다』 등의 동시집과, 『연어』, 『물고기 똥을 눈 아이』, 『고양이의 복수』 등의 동화, 『백석평전』 등의 논픽션을 각각 저술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이리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를 하던 그는 1989년 8월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시 「너에게 묻는다」를 창작해 많은 이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스스로 뜨거운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을 가슴 깊이 넣어 두고 살던 시절의 마음을 담은 시로,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에 실렸다. 그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밥줄을 끊긴 자의 오기 혹은 각오가 이런 시를 만들어낸 것 같다”고 회고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섬세한 감성과 따뜻한 시선의 주옥같은 서정시를 쓰고 있다.
―시 창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나, 방법이나 원칙이 있는지.
“꽤 오랫동안 시인의 세계관이 시를 낳는다고 생각했는데, 근래에 생각이 좀 바뀌었다. 시인의 세계관이 언어를 낳지 않는다는 것. 언어는 시인이 목적한 바대로만 이끌려가지 않는다는 것. 시를 창작하는 그 어떤 원칙도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세상과 사물과 타자가 불러주는 언어를 시인은 받아 적는 사람이니까.”
그는 매일 오전 5시가 되면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를 들으며 세 시간 정도 글을 쓰거나 이메일을 통해 일을 한다. 오전에는 풀을 뽑거나 집안일을 하고, 오후에는 강연을 가거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나간다. 가끔 집 주위에 출몰하는 멧돼지를 조우하는 건 덤. 저녁에 반주 한 잔 하고 오후 9시쯤 일찍 잠을 청하는 시인 안도현은, 다시 새벽이면 어김없이 새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쓴다. 해가 뜨면 고개를 들어 내성천을 보기도 할 것이고, 가끔은 그곳을 찾는 흰목물떼새 부부를 만날 것이다. 그리하여 시의 순간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때론 쓸데없이 눈부시게, 혹은 찬란하게.
“흰목물떼새 부부는/ 자갈밭에 낳아둔 알이 서러웠다// 내 그림자를 보고 십 미터쯤 높이의 허공을 도려내며 다급하고 둥글게 울었다”(「내성천 흰목물떼새 부부에 대하여」 전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안도현 작가 제공 기자 admin@slotnara.info
궁리 끝에, 시인 안도현은 마사토 한 트럭을 주문했다. 40년 동안 거주했던 전주를 떠나 고향인 예천으로 돌아온 뒤 텃밭을 가꾸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상을 보내오던 그였다. 정년이 몇 해 남았음에도 지난 2월말로 교수직까지 그만둔 그는, 덤프트럭이 마당에 부어놓은 마사토를 삽으로 떠 꽃밭에 넣은 뒤 돌을 고르고 있었다.
이때 동네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친구가 찾아오면서 의도치 않은 수작을 벌이게 된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사느라 만나지 못하다가 귀향한 뒤 다시 만난 농사 친구였다. 불교 선문답 같은 두 사람의 대화는 마지막에 깜짝 놀랄 반전을 맞는다. 툭, 하고 한 편의 시가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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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 「너에게 묻는다」를 비롯해 소박한 일상과 자연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섬세한 감성과 따뜻한 시선의 시인 안도현(64)이 「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를 비롯해 71편의 시를 묶은 신작 시집 『 야마토게임예시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문학동네)를 발표했다. 전작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이후 5년 만으로, 그의 12번째 신작 시집이다.
안 시인은 4부로 이뤄진 이번 시집 사이다쿨 에 작고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은 시편부터 귀향 이후의 일상을 다룬 작품과, ‘북’의 이미지를 담은 시편 등을 담았다. 전주에서 예천으로 귀향하고, 어머니가 작고하고, 생전 처음 병원을 드나들고, 오래 밥을 빌던 학교를 그만둔 뒤 삶의 궤적과 닿아 있다.
그는 이들 시편을 통해 무엇이 쓸데없고 의미 없는 일이고, 무엇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존재인지,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지를 곱씹게 한다. 즉, “정말 약한 것들의 편에 서서 노래를 불렀을까”(「순간 정지」) 하고 성찰하기도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을 쓰고 나니/ 나는 더 편안해졌다”(「연민」)고 느끼기도 하며, “나는 쓸모없는 걱정을 하다가 가장 쓸모없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라는 생각도 한다”(「흰목물떼새」).
시인 안도현은 왜 작고 쓸모없고 의미 없는 존재들에 주목하게 된 것일까. 그가 보고 느끼고 그린 작고 쓸모없는 존재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안 시인을 지난달 30일 문자 메시지와 전화로 만났다.
―이번 시집에선 자유자재의 어떤 시적 경지가 느껴지는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
“거의 평생을 아파트라는 허공의 둥지에서 살다가 5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땅에 착지를 하고 살게 되었다. 마당과 텃밭과 연못과 돌담이 일상이 되니,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더라. 아침마다 창을 열면 새소리가 무진장 쏟아져 들어오는데, 이 새소리를 보자기에 싸서 누구에게 좀 보낼까 싶을 때도 많았다. 저는 1980년대 이후 꽤 오랜 동안 시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면서 시인으로서 어떤 의무감을 지고 살아왔다. 그 무게를 지금은 덜 느끼는 편인데, 말 하나하나의 빛깔과 물기를 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마주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렇다고 도통한 척 하려는 건 아니다. 앞으로도 시를 쓰는 저보다 제게 오는 언어를 더 잘 모시고 그 언어를 덜 간섭하고 잘 따라가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왜 ‘오는 언어를 더 잘 모시고 따라가도록 내버려두고 싶다’는 마음에 이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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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투병 끝에 최근 작고한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담은 시편으로 문을 연다. 1939년 일본 구로사키에서 태어난 어머니 임홍교 여사는 그의 귀향을 기다리던 중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팬데믹 시절 두꺼운 유리문 안에 갇혀 있다가 작고했다. 다만 그가 모친과의 이별에서 오로지 슬픔과 아쉬움만을 발견한 건 아니었다. 어머니가 작고한 뒤에 글이나 행동이 더 자유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그는 고백한다.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내고 면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지웠어요// 저는 이제 물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었어요/ 쨍한 코끝으로 연못 위에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연못 위에 쓰다」 부문)
―작고한 어머니를 노래한 시편이 적지 않은데.
“어머니의 죽음을 시를 쓰는 자식으로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지난 몇 년 동안의 숙제였다. 어머니는 마흔두 살에 남편을 잃고 아들 넷을 고생하면서 키운 분이시다. 그 신고의 삶에게 바치는 나의 언어는 어떤 꼴을 해야 하는가,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그 순간의 거리는 얼마인가, 사적인 체험과 객관적인 평정심의 관계는 어찌 설정해야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쓰게 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역시 예천으로의 귀향 이후 일상을 다룬 시편들이다. 닭을 키우고(「장닭」), 풀을 뽑다가 벌에 쏘이거나(「벌에 쏘인 이야기」), 유리창에 부딪혀 죽은 물총새를 땅에 묻거나(「간단하고 명료한」), 장에 나가 열무씨를 사는(「열무씨 이천원어치에 대하여」) 시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눈이 게으른 새떼처럼 오고 있다// 나는 돌배나무 아래 들어 천지에 꽃망울 뒤척이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고 손으로 눈을 받았다고 쓴다, 손금이 눈송이를 튕겨올렸다고 쓴다// 냇가에 사는 흰목물떼새가 마당 안까지 냇물을 끌고 왔다 새는 목덜미가 하얘질 때까지 울었는데 울음소리가 가볍다// 새야, 구절초 씨앗 뿌려놓은 꽃밭은 기웃거리지 말아라 씨앗을 다 쪼아먹으면 나는 내후년 가을에 어떡하노?// 나는 쓸모없는 걱정을 하다가 가장 쓸모없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라는 생각도 한다// 땅에 떨어진 깃털이 새의 윤곽이라는 말을 들었다, 라고 쓴다”(「흰목물떼새」 전문)
―어느 겨울 끝자락에 만난 「흰목물떼새」의 노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절창이다.
“예천 집 앞에 내성천이라는 낙동강 지류가 흐른다. 예전에는 은모래가 눈부시던 강이었다. 해마다 4월이 되면 멸종위기종인 흰목물떼새가 강변 자갈밭에 알을 낳아둔 것을 산책하다가 가끔 본다. 외부 침입자로부터 알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울음소리, 별난 행동도 조금 알고. 흰목물떼새는 자갈밭에 자갈 모양과 빛깔과 유사한 알을 낳는데, 그게 너무 신기해 첫해는 여러 차례 알을 보러 나갔다. 지인들을 데리고 가서 보여주기도 했고. 그런데 부화 시기가 지났는데도 알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더라. 어미는 보이지 않고. 그게 틀림없이 지나치게 관심을 보인 제 탓이라고 저는 생각했다. 인간인 제가 새의 부화를 방해한 죄인이 된 것이다. 새와 저의 관계를 비롯해 닭장에서 십여 마리 키우는 닭들과의 거리, 길가의 산국꽃과 저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시를 쓰고 싶을 때가 많아진다. 「장닭」이라는 시도 실제 있었던 이야기다.”
시집에는 또 제목에 ‘북’이 들어가거나 본문에 ‘북’을 언급한 작품도 10여 편에 이른다. 여기에서 일부 ‘북’은 실제 북한과 연루되기도 한다. 일찍이 『북항』(2012)이라는 시집을 냈고, 스스로 평양을 대여섯 차례 다녀오기도 한 시인이다.
“북천은 바로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손 뻗으면 닿는 거기에 있어요 북천은 만질 수는 없지만 보이는 곳에 있어요 북천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쌓아둘 수도 없지만 북천은 부서지지 않고 흘러내리지 않고 물렁거리지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요 북천은 비누처럼 미끌거리고 대파처럼 맵싸하고 비스킷처럼 바삭거려요 이 의미 없이 좋은 북천”(「북천」 부문)
―북문, 북촌, 북산, 북당, 북행 등 ‘북(北)’ 이미지가 집중적으로 배치돼 눈길을 끄는데.
“‘북’은 북쪽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무서운 이데올로기를 떠올리게 하는 묘한 말이다. ‘북’이라는 말에 갇히기 싫어서 더 ‘북’을 불러 보고 적어보고 싶었다. 말의 억압으로부터 회피하는 것보다 억압을 주는 말 속으로 자꾸 들어가 본 것이다. 그랬더니 예상외의 소득이 있었다. ‘북’을 경계하고 거기에 주눅 들어 있던 마음이 정말 편해졌다.”
―결국 이번 시집은 작고 의미 없고 쓸모없는 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아지는 것 같다.
“어떤 의미를 생산하고 전파하기 위해 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이나 철학이나 윤리 교과서가 담당해야 할 영역이다. 시인은 의미를 규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의 감각을 질문하는 사람이다. 의미의 감각이란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의 상태, 의미의 울타리에 갇히기 직전의 상태를 말하는데, 그 감각을 지닌 게 언어다. 언어가 머무는 곳은 세상의 상층부가 아니라 쓸모없다고 여기는 것에 오히려 더 오래 깃들게 마련이다.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할 수 없고 산업의 잣대로 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영역이다. 귀향 후 시골 골짜기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돌멩이 하나, 길지 않은 노끈 한 가닥, 텃밭 오이꽃의 빛깔, 길고양이의 울음소리 들이 모두 하나같이 쓸모없는 것 같아 보여도 소중하게 여겨지더라.”
초등학교 6학년 때 대구로 전학하면서 사촌 형들과 자취를 하게 됐다. 친구와 사촌형들이 TV를 볼 때, 그는 TV 대신 책을 읽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느끼게 되는 어떤 그리움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을 일찍 깨닫게 됐고, 이 같은 결핍의 감정은 그를 자연스럽게 문학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고교 2학년 시절 가입한 학교 문예부 활동이 결정적이었다. 동기 선후배와 함께 시와 문학을 읽고 공부하며 관심과 애정을 키워갔다. 각종 백일장과 문예현상 공모에도 응모해 많은 상을 휩쓸며 소년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시인 안도현의 씨가 뿌려지던 순간이었다.
“1970년대 후반 대구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시를 읽었더니 시가 쓰고 싶어졌고, ‘현실 너머’를 상상하고 거기에 다다르는 언어를 찾게 되었습니다. 오래 시를 쓰고 시를 가르치는 현장에도 있었지만 내가 구사하는 언어를 항상 갱신해야 한다는 생각은 평생 숙제처럼 안고 살아요.”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학교 수업이 휴강되자, 대학 1학년생 안도현은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 밤,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무릎이 꿇린 채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다. 이 사건을 겪은 뒤 문학주의자였던 그는 세상과 문학을 새롭게 보게 됐다.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안도현은 시 「낙동강」이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시작으로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기러기는 차갑다』 등의 동시집과, 『연어』, 『물고기 똥을 눈 아이』, 『고양이의 복수』 등의 동화, 『백석평전』 등의 논픽션을 각각 저술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이리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를 하던 그는 1989년 8월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시 「너에게 묻는다」를 창작해 많은 이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스스로 뜨거운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을 가슴 깊이 넣어 두고 살던 시절의 마음을 담은 시로,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에 실렸다. 그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밥줄을 끊긴 자의 오기 혹은 각오가 이런 시를 만들어낸 것 같다”고 회고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섬세한 감성과 따뜻한 시선의 주옥같은 서정시를 쓰고 있다.
―시 창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나, 방법이나 원칙이 있는지.
“꽤 오랫동안 시인의 세계관이 시를 낳는다고 생각했는데, 근래에 생각이 좀 바뀌었다. 시인의 세계관이 언어를 낳지 않는다는 것. 언어는 시인이 목적한 바대로만 이끌려가지 않는다는 것. 시를 창작하는 그 어떤 원칙도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세상과 사물과 타자가 불러주는 언어를 시인은 받아 적는 사람이니까.”
그는 매일 오전 5시가 되면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를 들으며 세 시간 정도 글을 쓰거나 이메일을 통해 일을 한다. 오전에는 풀을 뽑거나 집안일을 하고, 오후에는 강연을 가거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나간다. 가끔 집 주위에 출몰하는 멧돼지를 조우하는 건 덤. 저녁에 반주 한 잔 하고 오후 9시쯤 일찍 잠을 청하는 시인 안도현은, 다시 새벽이면 어김없이 새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쓴다. 해가 뜨면 고개를 들어 내성천을 보기도 할 것이고, 가끔은 그곳을 찾는 흰목물떼새 부부를 만날 것이다. 그리하여 시의 순간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때론 쓸데없이 눈부시게, 혹은 찬란하게.
“흰목물떼새 부부는/ 자갈밭에 낳아둔 알이 서러웠다// 내 그림자를 보고 십 미터쯤 높이의 허공을 도려내며 다급하고 둥글게 울었다”(「내성천 흰목물떼새 부부에 대하여」 전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안도현 작가 제공 기자 admin@slotnar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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