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역할을 맡은 박강현 배우가 뗏목 위로 올라오려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대치하는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에스앤코


"어떤 이야기가 더 나은 이야기였나요?"
망망대해 태평양에서 227일간 폭풍을 견디고 살아남은 소년 파이는 생존 경위를 묻기 위해 찾아온 조사관에게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이야기와 잔혹하지만 사실적인 이야기 두 가지를 들려준 뒤 이렇게 묻는다.
연극도 뮤지컬도 아닌 새로운 공연 양식 '라이브 온 스테이지'를 표방한 '라이프 오브 파이'가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얀 마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난파된 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년 파이가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 구명보트를 타고 태평양을 표류하는 227일간의 환상의 여정을 무대에 옮긴다.
서울 강남구 GS아트센터 무대는 기존 공연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퍼펫·프로젝션 매핑·무대장치의 정밀한 조화로 관객을 140분 동안 스펙터클 속 바다이야기하는법 으로 끌어당긴다. 초반 형형색색의 원단이 휘날리는 뭄바이 시장, 평화로운 동물원, 낡은 화물선, 환상의 식인섬까지 이어지는 장면은 프로젝션 영상과 음향이 더해지며 마치 영화 세트장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특히 바닥 프로젝션을 활용해 폭풍우 속 화물선이 좌우로 흔들리는 장면은 정지한 무대임을 잊게 할 만큼 실감 난다. 2층 릴게임몰 파노라마석에서는 3면 벽면과 바닥에 매핑된 화려한 영상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시각적 충격은 더욱 극대화된다.
무대의 중심에는 정교한 퍼펫이 있다. 퍼펫은 사람이 조종하고 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생동감이 넘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3명의 퍼페티어가 15㎏에 달하는 벵골호랑이의 골격과 호흡, 꼬리 끝의 떨림까지 분담해 조종하며 동물의 몸짓 야마토게임연타 을 구현한다.
내부의 붉은 장기까지 재현된 완성도 역시 놀랍다.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이 등장하는 동물원 장면은 공연 초반부터 작품의 스펙터클을 예고한다. 커튼콜에서는 파이를 연기한 배우 못지않게 리처드 파커에게 기립박수가 쏟아진다. 주인공 파이를 연기한 박강현은 140분 내내 무대를 지탱하며 호랑이와의 대결, 폭풍과 갈증에 시달리는 오션파라다이스예시 움직임을 흔들림 없이 표현한다.
퍼펫을 조종하는 이들과 무대장치를 옮기는 인물이 무대에 드러난다는 점도 이 공연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들의 존재는 몰입을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파이가 꾸며낸 이야기의 인위성과 구성 방식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뗏목이 등장할 때 조연들이 구조물을 들고 나오는 모습, 병원 속에 있는 파이가 회상 속으로 다시 빠져들어갈 때 배우들이 순식간에 소품을 교체하는 과정 등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관객에게 직접 노출한다.
파이는 바다에서 살인과 식인이라는 '비인간적인 광경'을 목격하고 결국 자신도 가담한다. 본래 채식만 하던 브라만으로서의 삶에 자부심을 가졌던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기억이다. 그는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의 삶을 인간으로서 견뎌내기 위해 호랑이와 환상의 섬이 등장하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파이 이야기'를 두고, 인간이 참혹한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사실보다 더 나은 것'을 선택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파이는 과거의 체험을 그대로 전달하는 대신, 자신이 계속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방식으로 재서술한다. 그리고 무대 곳곳에 드러나는 퍼페티어와 장치 운용자들은 이 모든 이야기가 인위적 구성물임을 은근히 각인시키며 '어떤 이야기를 믿을 것인가'란 질문을 관객에게 되돌린다.
'파이 이야기'는 압도적인 기술적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에게 '이야기의 의미'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진다. 생존의 기록을 넘어, 인간이 고통을 견디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허구를 발명하는지를 보여준다. 당신이라면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 공연은 내년 3월 2일까지.
[구정근 기자]